[기획 인터뷰 1편] “돈을 좇으니 돈이 잡히지 않았다”

[기획 인터뷰 2편] “저는 평범한 사람...정도(正道)를 지키며 살아왔다”

[기획 인터뷰 3편] “K-바이오의 길에서 교과서적인 사례를 만들어 뿌듯하다”

[팜뉴스=최선재·김응민 기자] 이상훈 대표는 에이비엘바이오의 수장이다. 에이비엘바이오가 최근 사노피와 파킨슨병 치료 후보물질 ‘ABL301’에 대해 1조 30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 계약을 맺으면서 제약·바이오 업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다른 회사도 아닌 ‘글로벌 빅파마’ 사노피였다. 사노피는 유럽 최대의 제약회사로 지난해 매출액은 430억달러, 한화로 50조원을 넘겼다. 공룡 제약사가 한국의 바이오텍, 그것도 창립된 이후 6년밖에 되지 않은 에이비엘바이오를 파트너사로 선택한 것.

이번 기술수출을 계기로 에이비엘바이오에 지급할 업프론트(계약금)은 900억원이다. 단기 마일스톤까지 합치면 1440억원. 업계 종사자는 물론, 국내 주식 투자자, 또 다른 빅파마 관계자들의 관심과 질문이 이 대표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상훈 대표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어떤 마음으로 에이비엘바이오를 설립했을까. 본지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성남시 판교테크노벨리에서 이상훈 대표를 만났다. 창업 뒷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1편을 공개한다. 

에이비엘바이오 이상훈 대표
에이비엘바이오 이상훈 대표

이상훈 대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와 스탠퍼드대 등에서 5년간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했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를 졸업했고 세계 최고의 명문대에서 공부했다. 

이뿐 아니다. 학생 신분을 떠나서도 엘리트다운 이력을 이어갔다. 세계 최고의 바이오사인 미국의 제넨텍,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에서 일했다. 그야말로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가 이상훈 대표다. 

지난달 9일 팜뉴스 취재진이 이 대표를 만나기 직전, 에이비엘바이오 설립이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배경이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거물들은 대부분 서울대·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그동안 처절한 가시밭길보다는 평탄한 고속도로를 달려왔을 것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지난달 9일 그를 마주했을 때, 취재진이 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비엘바이오를 창업한 계기를 묻는 첫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2009년 파멥신 공동창업자로 참여한 이후 2013년 한화케미칼 바이오사업부로 들어갔다. 하지만 입사 6개월 만에 회사를 청산하라는 임무를 맡았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의욕적으로 일하려고 했는데 ‘청소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을 지으려고 왔는데 있는 집마저 허물어버리라는 뜻이었다. 허문 다음 새집을 지으라고 하지 않고 그저 허무는 것이 제 과제였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한화케미칼 바이오사업부 청산 절차의 시작 시점은 2014년, 완료 시점은 2016년이었다.

이 대표는 “집을 지어야 하는데 뭔가 부시는 것만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작업은 제게 쉽지 않았다”며 “더구나 청산이 끝나고 2016년 말이 되면 제 인생이 너무 고달플 것 같았다. 마음 속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이었다.”

이 대표의 나이는 50대. 그는 창업을 시작하기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화케미칼 재직 시절, 삼성 등 수많은 대기업의 제안을 받았지만 뿌리친 이유다.

“다른 곳에서도 면접을 보라고 했다”며 “하지만 숙고를 해보니, 재창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멥신을 공동창업했을 당시보다 경험이 더욱 생겼고 그때의 실수를 보완할 수 있겠다고 믿었다.”

첫 번째 창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 이 대표는 “두 번째 ‘창업’에 대한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며 “처음 창업할 때는 걱정과 염려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잘할 수 있겠다’라고 느꼈다.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이중항체 플랫폼 개발에 대한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었다. 이직보다 창업 쪽으로 마음먹은 계기였다. 

직장 동료들도 힘을 실어줬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창업을 한다고 하면 대표이사를 포함한 3~4명이 시작을 해서 일종의 빌드업(Build-up)을 해야 한다”며 “만약 한화 연구조직에서 , 내가 창업한다고 했을 때 따라올 사람들이 있다면 더욱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직간접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합류를 제안했다”고 답했다.

그 결과, 한화케미칼 바이오사업부의 연구 인력이 그를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다. 무려 14명,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이 대표는 “헌신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려고 저를 따라나선 것이 아니다”며 “저의 구상, 일종의 이중항체 플랫폼에 대해 가능성이 있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합류를 결정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2015년, 이 대표는 자신의 비전을 한국투자파트너스(한투파)에 설명했다. 그는 “한투파에 사업 계획을 설명했는데 처음에 만났을 때 답이 없다가 어느 날 연락이 와서 ‘함께 할 수 있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런 것들이 박자가 맞아서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고 밝혔다.

이듬해 2월 28일, 연구인력 14명이 한화케미칼 바이오사업부 연구소를 퇴사했다. 그는 “직원들은 이미 나갔지만 저는 여전히 한화에 있었다. 이재천 본부장이 연구원들을 데리고 연구를 먼저 시작했고 저는 한화가 사업을 접은 이후인 그해 7월에 합류했다. 약 20명이 이 건물(본사)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큰집이 텅텅 비었다.” 그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5년이면 이곳이 직원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란 왠지 모를 기대감이 있었다고 전했다.  

“첫 창업을 할 때는 정말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돈을 좇다보니 돈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한화에서 쓰라린 경험을 하고 제 생각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회사의 비전은 돈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회사의 이름은 ‘에이비엘바이오’, ‘abl’은 ‘a better life’의 약자로 ‘인류에 더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신약 개발을 통해 인류가 더욱 건강하고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에이비엘바이오의 비전이었다.  

정확히 6년 후인 2022년 1월, 에이비엘바이오 본사 건물엔 90여 명의 직원이 들어찼다. 이 대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질병인 파킨슨병 치료 후보 물질에 대한 기술 수출 계약서에 최종적으로 서명했다. 에이비엘바이오의 꿈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비엘바이오 이상훈 대표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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