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 1편] “돈을 좇으니 돈이 잡히지 않았다”

[기획 인터뷰 2편] “저는 평범한 사람...정도(正道)를 지키며 살아왔다”

[기획 인터뷰 3편] “K-바이오의 길에서 교과서적인 사례를 만들어 뿌듯하다”

[팜뉴스=최선재·김응민 기자] 언론의 관심은 ‘결과’와 ‘성공’으로 향한다. 제약·바이오 산업도 다르지 않다. 국내 바이오 기업이 글로벌 빅파마에 기술 수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대표를 찾아 성공비결을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빛나는 업적을 주목해서 대중의 시선을 끄는 셈이다.

하지만 팜뉴스 취재진은 인터뷰 중반부터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를 향해 기존의 문법과 다른 형태의 질문을 이어갔다. 인생의 궤적을 따라가면 ‘현재’가 보인다. 이 대표 자신의 삶과 이야기가 궁금했던 이유다.

팜뉴스가 앞서 공개한 ‘인터뷰 1편’이 에이비엘바이오의 창업 ‘뒷이야기’였다면 2편은 이 대표의 학창시절과 유학 생활을 다뤘다. 그는 치열한 고민과 갈등을 거쳐 ‘바이오’라는 키워드를 향해 걸어왔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 인터뷰 모습
이상훈 에이비엘바이오 대표 인터뷰 모습

고등학교 시절, 이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생물이었다. 그는 “다른 과목보다 생물을 좋아했다”며 “처음에는 생물 과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수학 중 골라야 한다면, 물리는 정말 못하겠고 수학도 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고등학생 때는 수학을 굉장히 잘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캘큘러스(CALCULUS)2를 들었을 때 A 학점을 받을 수 없었다”며 “화학은 원래 저랑 맞지 않았다. 다만 생물 과목을 들었을 때 호기심이 많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결국 서울대학교 생물교육학과를 선택했다. 생물학은 영어로 ‘바이올로지(biology)’다. “학생 때부터 제약·바이오 산업에 관심이 있었느냐”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다. 생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다. 더구나 사범대학이었기 때문에 대학 때는 산업 쪽으로 선택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학 동기들도 교장, 교감, 평교사들이 많다. 다만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89년은 이 대표가 유학길에 오른 해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학위를 위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로 향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그는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Post-doctoral researcher) 과정을 통해 바이오 연구에 매진했다. 

“하버드 의대와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했다. 당시에는 미국 유학을 가면 무조건 교수였다. 하버드대에 있을 당시 서울대 지도교수님은 ‘너는 당연히 교수가 돼야 하니, 빨리 들어와라’고 말했다. 서울대(모교)는 아니더라도, 국내 사립대 교수직으로 임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직업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아내와 함께 ‘우리가 앞으로 어디에 정착해야 할 것인지’를 상의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아내는 저보다 일찍 유학을 갔다. 흔히 말해 저보다 미국물을 먼저 먹었다”며 “미국에 직장도 있었다. 제가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한 이유다. 하지만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스탠퍼드 대학 지도 교수가 미국 사회의 ‘현실’을 알려줬다는 것. 교수는 “인종차별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미국에서 백인이 아닌 동양인이 성공을 하려면 정말 천재적이어야 하는데, 과연 당신은 천재인가”라고 이 대표에게 물었다고 한다. 

“스탠퍼드 지도교수님은 의대 학장이었고 남편은 의대 부총장일 정도로 소위 잘 나가는 백인들이었다. ‘천재적’이라는 물음의 뜻은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좋은 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교수가 될 수 없어’라는 직설적 표현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시 이 대표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천재가 아니고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고 미국에서 직업도 프로그래머였다. 저도 미국에서 교수로 살면서 자리를 잡을 생각을 했었는데 교수의 조언을 듣고 ‘나도 미국의 좋은 학교에서 교수가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깨졌다.”

이 대표는 고민을 거듭했지만, 의외로 ‘환경적인’ 요인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스탠퍼드 대학이 있는 캘리포니아 지역이 제넨텍(Genentech)이 있는 바이오 산업의 메카였던 것. 제넨텍은 세계 최고의 바이오 빅파마다. 

“지금은 보스턴 지역을 얘기하지만 바이오텍의 성지는 여전히 캘리포니아다. 실제로 제넨텍입구에는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탄생지(Birth Place of Biotechnology)’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다. 바이오 산업의 시작점이 제넨텍이었다는 얘기다. 스탠퍼드 대학의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자연스레 바이오 산업에 첫발을 내딛었다.”

결국 그는 미국의 제넨텍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카이론(Chiron, 현 노바티스),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엑셀리시스(Exelixis) 등 글로벌 바이오 기업에서도 일했다. 신약 개발의 노하우는 차곡차곡 쌓였다.

“신약 개발은 정말 어렵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동물실험을 하고 원숭이로 독성실험도 해야 한다. 사람을 상대로 임상 시험까지 가려면, 데이터가 확실해야 한다. 충분한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바이오 회사에서 일하면서, 신약 후보 물질의 임상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점을 과학자 그룹이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 대표가 연구원이 아닌 리더로서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일까. 2009년 그는 국내 바이오 기업 파멥신의 공동창업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 대표는 “40대 말까지는 저는 평범한 연구원이었다. 연구를 잘하고 말을 잘 들었다”며 “보스(상사)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동양인이었다. 실험을 열심히 했고 연구를 잘했고, 결과를 내라고 하면 냈다. 그런데 파멥신 창업 전후로 해서 마음의 동요가 오긴 했었다. 분명히 백인보다 내가 뛰어난 거 같은데, 진급이 늦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공동창업의 기회가 왔을 때 고민이 많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가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다”며 “그때, 용기를 낸 점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맨 땅에 헤딩을 하면서 배웠던 것이 지금의 에이비엘바이오를 설립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2016년 에이비엘바이오을 창업한 이후 6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 대표는 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 됐다.

그런데도, 그는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 대표는 “계획대로 된 건은 없는데 정도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다. 생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꾸준히 정도를 지키며 살아왔더니 현재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신약 개발의 꿈도 키우지 않았다. 미국 유학생활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바이올로지’ 곁에 있었다.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뜻이다. 

정도(正道)의 뜻은 “올바른 길”이다. 거대한 꿈보다 중요한 것은 올곧은 가치와 신념이다. 이 대표의 평범한 철학이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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