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뉴스=최선재 기자] 환자에게 진료의뢰서(소견서)는 희망이다. 1차 의료기관(의원급) 또는 병원을 전전하면서 수많은 돈을 지불했는데 차도가 없으면 소견서를 요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진료의뢰서를 받으면 그래도 기분이 나아진다. 

대학병원을 갈 수 있는 일종의 보증수표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진료의뢰서만으로 환자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경우도 많다. 

대학병원 ‘어깨 명의’를 검색했다. 서울대병원 정형외과는 3개월 이상 기다려야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서울성모병원은 인터넷 진료 예약이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뒤 서울 서부권 유명 병원의 교수의 진료 일정이 비어 있었다. 예약을 서둘렀다. 

3월 18일 오전 9시 30분. 진료실에 들어갔다. 교수는 증상을 먼저 묻지 않고 어떤 문제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두 달동안 어깨가 아파서 고생을 했는데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어깨인지 목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목 쪽에 MRI를 찍었고 경추 디스크라고 하는데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

교수는 내 말을 막으면서 “나는 목 쪽은 안 보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사전에 제출한 MRI 사진에 있는 경추 사진을 보면서 “목은 제 전공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혹시 진료의뢰서 읽으셨나요?”라고 물었지만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는 마음이 바쁘고 급해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경추 MRI 사진에 집중하면서 신경과 또는 신경외과를 가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어깨를 어떻게 다쳤느냐”고 했다. 

내 표정은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교수가 진료의뢰서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진료의뢰서 첫 줄에는 “환자분은 약 1개월 전에 앞으로 넘어지면서 시작된 충격 이후로 지속된 어깨 통증으로 내원했다”고 쓰여 있었다.

경추 MRI 사진도 전부가 아니었다. CD에 파일을 조금만 신경써서 찾으면 어깨 초음파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교수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눈치였다. 다만 상기된 내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다가와서 어느 쪽이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왼쪽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야. 여기 그거 하나만 놔줘라”

교수는 진료실 책상 앞 컴퓨터에 앉아 있는 다른 두명의 의사를 불렀다. ‘그거’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아프다고 하니까. ‘옛다’하고 던져주면서 선심을 부리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본 뒤, 두 팔로 미는 힘이 다른 젊은 사람보다 유난히 적다고 하면서 사진을 찍어보자고 했다. 

X-레이인지 MRI인지 CT 촬영인지 어떤 사진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묻고 싶었지만 교수는 “이제 나가봐도 된다”는 뉘앙스로 나를 쳐다봤다.

결국 진료실 밖으로 나온 이후, 간호사의 설명으로 80만원에 달하는 MRI를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의료 전문가, 그것도 ‘명의’를 만났는데 약 3분 만에 기분이 더러워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교수의 실력보다는 무성의하고 건방진 진료 태도 때문이다.  

무엇보다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왜 진료의뢰서에 나온 기본적인 사실도 보지 못하셨어요?” , “주사 치료에 대한 설명은 왜 안하셨어요?” , “왜 80만원을 써야 하나요” , “영상 CD 속에 초음파 사진도 있었는데 그것을 보려는 노력을 안하셨는지 궁금하네요”라고 항의했어야 하는데 흰 가운 앞에서 또 다시 작아진 것이다.

더욱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이 병원 말고 갈 곳이 없다’는 절망이었다. 당장 병원을 박차고 나갔고 싶었지만 교수가 말한 ‘그거’를 맞기 위해 병원 복도해서 기다려야 하는 내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명의’를 기다린 기대와 희망도 송두리째 뽑혔다. “또 다시 그병원에 가서 다른 병원에 갈테니 진료의뢰서를 써달라고 해야 하나”라는 걱정도 들었다. 

“최선재 환자 들어오세요” 

주사실로 들어가자 교수가 아닌 젊은 의사가 나타났다. “진료 의사가 주사 치료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서비스인데 그 교수는 어디로 갔을까”. 이번에도 그런 의문에 대한 설명이 없었지만 화를 누르고 젊은 의사에게 물었다. “어떤 주사에요?”

“리도카인 성분이라고 염증을 완화하는 주사입니다”

리도카인 성분은 이미 앞서 방문했던 통증의학과에서 처방한 약물이었다. 그 약물은 써도 차도가 없었기 때문에 대형 병원을 찾아간 것인데 교수는 진료의뢰서에 쓰인 내용을 무시하고 같은 약물을 처방한 것이다. 

진료를 마친 원무창구 앞에 자신의 납부 순서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 속에 나도 앉아야만 했다.

그 시간동안 내 마음은 무겁게 짓눌러졌다. 호흡을 억죄어오는 무엇인가 '쿵' 하고 얹혀진 느낌이었다. 

기계적으로 환자를 돌보고 '명의' 칭호를 얻은 의사 때문일까, 인격적으로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럼에도 8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내지 않고선 병원 밖을 나서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럴까. 

나는 ‘병원의 현금인출기’가 된 기분을 느꼈다. “여기 앉아 있는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에 만족할까. 대학민국 최고의 의료기관에서도 형편없는 서비스를 받았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라는 상념속에서 통원증명서류를 발급받았다. 

진단명은 회전근개열상(M75.1). 이번에도 진단명이 달랐다. 4곳의 병원에서 5번의 치료를 받는 동안 제각기 다른 5개의 진단명을 얻었다. 이번 진료비는 약 2만 5000원. 그동안 쓴 돈은 약 120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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