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leeheekyoung@hotmail.com)

두 아이가 모두 주말을 끼고 캠핑을 떠났다. 오후 2시에 떠나 다음 날 3시에 도착할 예정이니 꼬박 24시간 남짓의 ‘황금휴가’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남편과 단 둘이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아라리오 뮤지엄 in Space’에 가기로 했다.

故 김수근 건축가의 대표작품으로도 유명한 ‘공간(Space)’에 들어선 뮤지엄은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남편과 미술작품을 보고 싶은 나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화인들의 사랑방서 뮤지엄으로 변신

최근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 이 곳은 김수근 건축가가 1977년에 완공해 오랫동안 공간그룹의 사옥으로 사용돼 왔던 곳이다. 그의 설계사무소이자 월간지를 발간하고 화랑과 소극장을 운영하며 문화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이곳은 공옥진의 ‘병신춤’이나 김덕수의 사물놀이패가 첫 데뷔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간그룹의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워지며 부도 위기에 처하자 미술품 컬렉터이자 사업가인 아라리오 그룹의 김창일 회장이 2014년에 인수해 그가 35년간 수집했던 미술품을 전시하는 뮤지엄으로 재변신하게 됐다.

폐쇄적인 듯 하면서 열린 미로 속 건축 구조

‘공간’을 생각할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건물 전체를 촘촘하게 뒤덮은 담쟁이 덩굴이다.

건축당시에 외벽을 장식하기 위해 심었던 담쟁이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공간’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됐다. 초록색 담쟁이 덕에 자연 친화적인 느낌이 들지만 외관상 이 건물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네모반듯한 외관 덕에 다소 폐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곳의 숨은 매력은 바로 건물의 안쪽. 건물 안으로 들어가 실내를 거닐다 보면 ‘둘러싸여 있되 결코 막히지 않은 곳’을 만들고자 했던 작가의 생각이 몸으로 그대로 체감된다.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닐수록 공간은 확장되며 흡사 미로속으로 빠져든 듯 층과 층사이의 구분마저 모호해 진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속, 7층과 8층 사이에 존재했던 7과 1/2층처럼.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대지의 경사를 살려 반 층씩 높이는 기법을 사용하고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설계된 크고 작은 방들이 중첩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곳은 또한 어렸을 때 친구들과 뛰어 놀던 동네의 골목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길은 어느 새 또 다른 곳으로 연결돼 끝없이 이어지던 길.

미술계의 거목 김창일 회장의 컬렉션 전시

아라리오 뮤지엄을 운영하는 김창일 회장은 ‘세계 1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세 번이나 올린 미술계의 큰 손이다. 앤디 워홀, 키스 해링, 신디 셔먼, 수보드 굽타를 비롯해 백남준, 김기창, 이응노, 강형구, 권오상 등의 국내외 유명 작가들을 아우르는 그의 컬렉션은 약

3,700여점에 달하며 현재 이 곳 에는 그 중 약 165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럽과 동남아시아, 한국의 근 현대 등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는 그의 컬렉션 덕에 이 곳에서 만나는 작품 세계 역시 다양하다.

▷백남준 작품

그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백남준 작가의 작품이다. 미디어를 이용한 새로운 예술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현대인의 방랑자적인 삶을 표현한 ‘노마드(No-mad)’에서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진 작고 낡은 버스에 온갖 잡동사니를 싣고 특유의 여유롭고 재치 있는 표정으로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TV Cello’는 TV Cello로 연주하는 여인의 모습과 소리가 담긴 세 개의 티비로 만들어졌다. 크기가 서로 다른 세 개의 화면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아크릴판, 그 위를 가로 지르는 기다란 네 개의 현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강형구 작품

2미터를 훌쩍 넘는 크기로 벽면을 가득 채운 ‘놀라고 있는 워홀’은 강형구 작가의 작품이다. 극사실주의적인 대형 인물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강형구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알루미늄판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전동드릴을 이용해 수많은 스크래치를 내어 워홀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색 머리카락을 표현해 냈다.

2층과 3층 사이 혹은 3층을 올라가면 신디 셔먼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로서 자기 자신을 직접 연출하고 촬영하는 self-portrait 기법으로 유명한 그녀는 초상화 형식이 부각된 이번 작품에서 ‘매우 평범한 나이 든 여성들-당신이 슈퍼마켓에서 찾아낼 수 있을 법한 타입’의 여성들로 변신했다. 진한 눈 화장, 과도한 옷차림이나 장신구 등을 통해 대중매체가 생산해 내는 미적 기준에 도달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모습은 없어진 여인들의 자화상을 통해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에 대한 반기를 든다.

작가가 의도한 공간의 의미

기존의 공간사옥 건물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살린 건물은 전시관람 동선도 특이하다. 낮은 천장을 지나고 반쯤 올라간 바닥을 올라가거나 원형 나선 계단을 내려가면 다시 새로운 전시물이 나타나는 식이다.

예전에는 화장실과 탕비실로 사용되었을 공간도 그대로 살려 공간에 맞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자리 잡은 크리스탈 사슴은 일본인 작가 코헤이 나와의 작품이다. 크고 작은 크리스탈이 온 몸을 수놓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투명한 크리스탈을 통해 박제된 사슴의 털을 볼 수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실재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작가의 의도와 같이 아름답게만 보였던 사슴이 한 순간에 슬프게만 보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미로 속 ‘공간’에서 보낸 시간은 채 두 시간이 안 됐지만 마치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 든다. 마당에 나오니 석탑주변으로 초여름의 오후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눈다. 기분 좋은 만족감에 취해 나와 남편도

그들의 무리에 합류해 깊어가는 초여름의 오후를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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