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뉴스=최선재 기자] BTS(방탄소년단)을 앞세운 K-POP이 세계 음악 시장을 휩쓸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 송강호 배우가 열연한 ‘브로커’ 등 K-영화도 각종 국제 영화제를 석권 중이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같은 K-드라마 흥행은 이제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처럼 대문자 ‘K’는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단어다. 

하지만 기자는 지난해 가을, 이곳저곳에서 취재원을 만나고 연락을 돌리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접했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K’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들, 특히 신약 개발과 임상 승인을 맡은 담당자들은 ‘K(한국형)-규제’라는  널리 쓰지만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이들에게 ‘K-규제’는 식약처가 만들어낸 이상한 규제를 뜻했다. 이는 식약처가 해외 규제 당국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지만 도리어 업계의 발목을 잡는 경우다. 제도를 차라리 그대로 들여오면 업계에 혼란이 없지만 한국 현실을 이유로 세밀한 부분에서 특정 항목을 덧붙이거나 빼면서 규제로 돌변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요약하면 K-규제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업계는 지속적으로 “식약처가 도입한 선진 시스템이 오히려 규제로 변했다”고 식약처에 읍소해도 웬만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한국의 현실에 맞게 바꿨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란 말만 듣는다. 

둘째, 수개월이 지나서 겨우 인정을 하더라도 해결이 어렵다. 업계 관계자들이 식약처 연구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설득해서 그것이 ‘규제’라고, 문제가 있다고 식약처 답변을 얻어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셋째, 한국형 규제는 선진 시스템이란 이유로 더욱 고착화된다. 결국 제약바이오산업은 마치 뻘밭에 발목이 빠진 것처럼, 제품 인허가의 특정 영역에서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한 K-규제의 특징은 이렇다.  

“선진 시스템이 어떻게 규제로 돌변한다는 말인가?”  K-규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기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식약처는 국가 최고의 의학·약학 전문가 집단이었다. 당연히 그런 규제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자는 겨울에 접어들면서 식약처가 대대적으로 도입한 ‘중앙IRB(임상시험윤리위원회)’를 취재했다. 그때부터 K-규제의 지독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중견 제약사 임원은 우연한 만남에서 “제약사가 임상시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식약처 허가는 물론 개별 병원의 IRB(임상시험윤리위원회)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의 시스템은 이렇지만 식약처가 갑자기 ‘중앙IRB’를 출범시키고 이를 통과하면 병원 IRB를 신속히 끝낼 수 있다고 홍보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중앙IRB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중앙IRB를 통과해도 병원 IRB를 신속하게 통과하지 못한다. 병원 IRB에서 이미 중앙IRB를 통과한 내용을 조목조목 확인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식약처가 중앙IRB 심사 결과를 따를 법적 의무를 주지 않은 점이 문제다. 홍보를 믿고 임상에 뛰어든 제약사는 오히려 중앙IRB를 규제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기자는 사실 확인을 위해 식약처 임상정책과에 “새롭게 도입된 중앙IRB에서 한 번에 심사하는 제도로 홍보했지만 병원 IRB에서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약처의 공식 해명을 듣고 싶었지만 식약처는 중앙IRB의 중복 규제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임상정책과 담당자들은 “임상 진입 속도가 빨라진 사례도 많다. 기존 제도보다 보완사항도 적어지고 기간도 줄었다”는 입장을 줄곧 유지했다. 

“임상 속도를 높이기 위한 중앙IRB가 오히려 제약사의 임상 과정을 늦추고 있다”고 강조해도 “그런 문제는 없다”는 것이 식약처 입장이었다. 오히려 식약처는 기존의 중앙IRB 대상을 코로나19 치료제·백신과 항암제에서 전체 질환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업계의 목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중앙IRB 심사 결과를 개별 병원이 어느 정도 수용하도록 현행 약사법상 의무를 규정하지 않고 제도를 확대하면 문제가 계속될 것”이라는 업계 우려도 전달했다. 하지만 식약처 임상정책과는 “우리 병원의 현실은 다를 수 있다. 법 개정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체계가 잡힐 것”이라고 해명했다. 업계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식약처는 문제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앙IRB는 계속 운영됐다.   

팜뉴스 최선재 기자

하지만 우연히 들른 홈페이지에서 식약처 회의록 발견한 이후 아연실색했다. 

한국임상개발연구회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4월 식약처 임상정책과의 정기 간담회(회의록 5월 24일 공개) 회의록을 공개했는데, 연구회 주요 임원들이 식약처를 상대로 “현행 중앙 IRB 심의가 끝난 계획서에 대해서도 개별 기관 IRB 에서 신속심의를 진행하는 기관이 제한되어 있고, 추가 보완사항이 있거나 심의 시간이 장시간 소요되므로 개선이 필요하다”고 전한 것이다.  

식약처 임상정책과는 한국임상개발연구회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중앙IRB 제도의 실효성 문제 개선을 올해 임상 정책과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업계가 지적하고 팜뉴스 취재진이 질문할 때는 “중앙IRB가 제약사의 임상 속도를 늦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지적하지 않던 식약처였다. 하지만 식약처가 수개월이 지나서야 공식 회의 석상에서 이를 공론화하고 개선을 약속한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취재 내용을 정리해봤다. 

1. 중앙 IRB는 해외 규제당국의 선진시스템이다. 2. 해외 각국에서는 중앙IRB를 통과한 임상에 대해 개별 IRB가 발목을 잡는 일이 없을 만큼 효율적인 제도다. 3. 하지만 식약처는 한국 병원의 현실을 이유로 병원 측에 ‘중앙 IRB 심사 결과에 대한 수용 의무’를 부여 하지 않고 있다.

4. 중간에 살짝 변화를 주고 수정을 가한 것이다. 5. 이는 결국 규제로 돌변했다. 6. 업계가 수차례 호소했지만 단 한 번도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7. 수개월이 지난 뒤 최근 회의에서 어렵사리 인정했지만, 여전히 제약사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귀납적 추론의 결과, “중앙 IRB는 K-규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약 7개월에 가까운 취재 여정 속에서 해답을 내렸지만 씁쓸한 마음이 몰려왔다. 업계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었던 K-규제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한 까닭이었다. 더욱 기자를 슬프게 만든 점은 선진 시스템이 규제로 돌변해 업계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쯤이면 제약·바이오업계에서 ‘K’라는 단어가 제 모습과 명성을 되찾을까. 이런 식이라면 100년이 지나도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뻘밭에 빠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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