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정재훈 소장

2025년 10월 6일(현지 시간), The Nobel Assembly(노벨 총회) 사무총장 토마스 펄만(Thomas Perlmann) 교수가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와 내용을 발표했다.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은 “말초 면역 관용에 대한 발견(for their discoveries concerning peripheral immune tolerance)”으로 Mary E. Brunkow(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시스템 생물학 연구소), Fred Ramsdell(미국 샌프란시스코의 Sonoma Biotherapeutics)와 Shimon Sakaguchi(일본 오사카대학교)에게 수여됐다. 노벨 생리·의학상은 1901년 “디프테리아에 대한 혈청 요법의 응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의사의 손에 질병과 사망에 대항하는 승리의 무기를 제공한 공로”로 Emil von Behring(독일의 Marburg 대학교)에게 처음으로 수여되기 시작해, 2025년까지 116회, 232명에게 수여됐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생애 전 기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소화불량과 두통, 우울증 등을 호소했고, 요양원에서 장기간 요양하기도 했으며 온천에 머물기도 했다. 말년에는 협심증 발작 등과 같은 심장 질환을 앓았다. 그는 원시적인 환경에서 독성 화학물질을 다루는 실험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과로와 일을 위한 긴 여행이 일상이어서 그의 한 편지에 “내 집은 내가 일하는 곳이고, 나는 어디에서나 일합니다.”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잇따랐고 때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고, 1896년 12월 10일 새벽 2시 산레모에서 사망했다. 그와 그의 주변에 도사린 보건적 위험과 함께 그의 과학적 탐구심은 자연스럽게 그가 의생명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었다. 그는 실험 노트에 “질병을 완화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시험할 아이디어들을 자주 메모했다. 이런 관심과 개인적 이유로 1890년, 그는 어머니 안드리에테 노벨을 기리는 기금으로 왕립 카롤린 의학-외과 연구소에 5만 크로나(SEK, 약 13,000달러)를 기부했는데, 그 목적으로 “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실험 연구를 장려하고, 그 연구 성과를 교육과 의학 문헌에 활용할 것”으로 제시했다. 또한, 1894년경, 러시아의 생리학자 I.P. 파블로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의학화학 교수인 M. 넨츠키의 실험 연구에 대한 재정을 지원했다.

1976년부터 1999년까지 의학 노벨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Nils Ringertz 박사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선정과 수상을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주관하는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1810년 소규모 의과대학과 이발사들이 절단 수술을 하는 훈련을 하던 외과 전문학교가 합병하여 설립됐는데, 당시 스웨덴에서 이 연구소는 학문적으로 웁살라와 룬드대학교의 의대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이 이 연구소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른 의과대학들이 질병과 죄의 관계에 대한 끝없는 신학적 토론에 몰두하고 있었던 반면, 이 연구소는 설립자인 옌스 야콥 베르셀리우스와 안데르스 레치우스 덕분에 자연과학에 기반해 연구하고 의료 교육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벨은 카롤린스카 연구소 소아과 조교수이자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기금의 운용을 도운 호프스텐 박사와 교류하며 생물학과 생리학에 대해 오랜 시간 토론했다.

1890년, 폰 호프스텐은 파리에서 노벨을 만나 의과학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확인했고, 노벨은 젊고 잘 훈련된 스웨덴 생리학자를 만나 함께 연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생리학자 요한손(Jöns Johansson)을 만나 의과학에 대한 이해를 확대했고, 요한손은 같은 해 프랑스 세브랑에 있는 노벨의 연구실에서 근무하며 노벨을 도왔다. 1895년 11월 27일, 노벨은 유언장에 서명하며 자신의 재산 중 가장 큰 몫을 일련의 상, 즉 노벨상에 기부했는데, 노벨은 그의 유언장에서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헌정할 것을 명시했다.

1896년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됐을 때, 그의 친척 몇몇이 유언장에 의문을 제기했고, 노벨 재단의 정관이 작성될 당시 유언장의 정확한 문구가 면밀히 분석됐다. 연구소의 일부 구성원은 친척들의 청구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연구소의 개입을 주저했다. 노벨과 함께 일했고 그의 의과학에 대한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카롤린스카 연구소 요한손 교수는 이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노벨 생리·의학상 정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종적으로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는 이론 의학과 실험 의학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합의됐고, 이는 상을 수여하는 기관이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상당한 자유를 부여했다. 그 결과로 이론 의과학과 전임상 과학, 임상 의학 분야에 상이 수여됐고, 그 분야는 행동 과학에서 식물 유전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할 수 있도록 폭넓게 해석되고 있다.

노벨이 사망한 후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벨 재단이 설립됐고, 1900년 스웨덴 국왕 오스카르 2세가 노벨 재단의 정관을 공포했으며, 노벨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의 의과대학이자 연구 센터인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여 수여해 왔다. 이에 따라 노벨 생리·의학상은 1901년부터 수여됐는데, 1915년, 1916년, 1917년, 1918년, 1921년, 1925년, 1940년, 1941년, 그리고 1942년에는 수상자가 없었다. 노벨 재단 정관에는 “심사 중인 연구 중 첫 번째 단락에 명시된 중요성을 지닌 연구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수상과 상금은 다음 해까지 유보되며, 그 후에도 상을 수여할 수 없는 경우, 그 상금은 재단의 한정 기금에 추가된다”라고 명시돼 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은 수상을 더 어렵게 했다.

노벨 재단 규정에 따르면, 두 명 또는 세 명의 공로가 모두 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면, 공동으로 수상할 수 있고 상금은 두 명 또는 세 명 수상자에 균등하게 분배될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상금을 4명 이상에게 분배할 수 없다. 이후 칼럼에서 2025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과학적 배경과 Mary E. Brunkow, Fred Ramsdell와 Shimon Sakaguchi의 수상 근거, 인터뷰 내용을 차례로 정리할 예정이다.

글. 정재훈 청론보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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