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전북대학교 약학대학 정재훈교수
사진. 전북대학교 약학대학 정재훈교수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는데……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어머니에 기대었던 나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가 없는 우울한 시간이 흘러갔고 한 달쯤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는 선물을 잔뜩 안고 밝은 얼굴로 돌아오셔서 모든 슬픔이 해소되는 듯 했지만, 그 이후 나는 가끔 자다 말고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커다란 공포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많은 시인들이 5월이면 신록과 꽃, 맑은 대기에 흐르는 바람과 내음, 눈부신 빛깔을 노래한다. 시인이 아니라도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볼라 치면 저절로 시 한 구절이 떠오를 만큼 고운 계절이다. 모두를 설레게 하는 5월임에도, 나의 가슴엔 이해인 님의 ‘5월의 시’ 한 구절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가 선명하다. 나에게 5월은 슬픈 계절이다.

2016년 5월, 병고에 시달리던 나의 어머니가 떠나셨고, 그 이후 나의 5월엔 후회와 안타까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끝도 없는 용서를 구해보지만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벌써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어머니와 온전히 이별하지 못한 채 “돌이킬 수만 있다면……”하는 죄책감으로 다시 5월을 맞았다. 이는 아마도 어릴 적 경험했던 이별의 트라우마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의 겨울, 어머니가 외가 식구들이 살고 있던 부산으로 가셨다. 어머니의 첫 외출이자 마지막 친정 나들이였다. “왜? 어떤 목적으로 가셨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날 오후에 흐르던 분위기는 지금도 내 가슴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슬프게 짐을 챙기면서도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시선과 신작로에 홀로 남겨졌던 나. 그전까지 형제들 중에 항상 나를 우선시하던 어머니의 태도를 고려할 때,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뿌리치고 부산행 여객선이 출발하는 성산포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셨고 나는 눈물범벅이 되어 버스를 쫓아 어둠이 덮이던 신작로를 한참동안 달렸다.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어머니에 기대었던 나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가 없는 우울한 시간이 흘러갔고 한 달쯤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는 선물을 잔뜩 안고 밝은 얼굴로 돌아오셔서 모든 슬픔이 해소되는 듯 했지만, 그 이후 나는 가끔 자다 말고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하곤 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커다란 공포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왜 그 때 친정 나들이를 하셨는지 들은 적이 없지만, 지금 와서 그 때의 형편을 돌이켜 유추해 보면, 어머니는 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시골살이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이모님의 도움을 받아서 자식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가의 형편을 둘러보시고 포기하셨던 것 같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나는 종종 어머니의 속을 끓였고 후회하곤 했다.

어떻든, 그 이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의 편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 편에 서려고 했다. 어머니와 헤어짐은 세상의 무너짐과 같은 슬픔이며 어머니의 편에 있어야만 어머니가 떠날 때 같이 갈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하여 더 악착같이 밭일과 바닷일을 하셨고 어머니의 헌신으로 우리 형제들은 동네에서 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우리들을 위한 어머니의 고생을 절감하고 있었기에 철이 든 후에 우리 형제들 모두는 성실하게 살아왔다.

나는 힘든 노역에서 어머니를 구해내고 싶었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삶의 동기와 현실의 성실함 모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어머니께서 늘상 하시던 말 “살당 보민 옛 말 고를 날이 이실거여!”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다행스럽게도 착하게 사는 우리 형제들을 보시며 노동으로 검게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졌고 웃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며 내가 잘하고 있고, 명절이나 대소사에 찾아뵙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여겼었다. 살만하게 된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고향에서 홀로 지내셔야 했다.

그 때 내가 변했어야 했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였고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방치하였다. 가끔 들려오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전히 바닷일과 자식들에 대한 염려로 손가락만 뒤틀린 것이 아니라 뇌도 뒤틀려가고 있음을 어리석은 나는 보지 못하였다. 

내가 나의 일에 쫓겨서 어머니와의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잊고 있던 어느 날, 기억을 잃어가던 어머니는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자식들의 성화로 고향 집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는 치매라는 질병에 좋은 기억들을 빼앗긴 채 자식들 집을 전전하는 처지가 되었고, 나에겐 또 다시 헤어짐의 트라우마가 찾아왔다.

이번엔 내가 어머니를 버리고 내 일터로 건너갔고, 가끔씩 뵙는 어머니의 얼굴엔 외로움이 가득했음에도 나는 외면했다. 어느새 어릴 적 내가 장성하면 어머니께 해드리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을 다 잊고 있었다. 핑계 같지만 한번은 어머니와 고향에서 함께 지낼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충성하고 있던 일터의 지배자들은 어머니와 나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각자의 시간에 쫓기던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돌보는 일에 지쳐갔고, 결국 나는 어머니를 말도 안 통하는 요양원에 가두어두고 기껏 일주일에 한번 들여다보는 것으로 자식 된 도리를 한다고 자위하였다.

나는 어머니 편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덜컥 덜컥 어머니와 단절이 두려웠지만 밀려드는 일에 휩쓸려 봄-여름-가을-겨울을 여러 번 그냥 보냈고 어머니를 위한 다른 시도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헤어짐을 예견하면서도 한심한 나는 어릴 적 스스로 어머니께 다짐했던 약속들을 기억의 방에 남겨두고 후회스럽게 어머니와 헤어졌다. 돌이키거나 복구할 수 없는 어머니와 두 번째 헤어짐은 나에겐 더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내가 죽을 때까지 이 트라우마를 견디어야 할지도 모른다.

5월이 오면, 어머니를 살피고 어머니와 함께하는 대신에 부질없는 일에 나의 노력을 낭비한 나의 어리석음이 안타깝고, 허투루 보낸 시간이 더 후회스럽다. 어머니가 숨을 다 한 후에서야 고향에 보내드린 불효자의 넋두리가 길어졌다.

종종 과거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며 상상해 본다. 혹시 미래 과학이 나의 후회를 되돌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어버이 날인데, 나는 카네이션을 보기가 여전히 부끄럽고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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