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몇 년 전에 '라쉬의 작은 꽃들: 라쉬 공동체의 진실한 이야기'(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란 책자를 번역해 발간한 적이 있다. 프랑스어로 ‘방주’라는 뜻을 지닌 라쉬(L’Arche) 공동체는 캐나다인 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 1928-2019)가 설립한 장애우 국제 공동체이다.

이 책은 전 세계 곳곳의 라쉬 공동체에서 있었던, 짧지만 아름다운 일화들을 모아서 소개한 단행본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장 바니에는 말한다.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합리적 지성이나 능력이 있지만, 이분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분들은 가면을 쓰고 살지는 않습니다. 이분들은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직관적이고, 즉흥적이며, 마음과 더욱 가까이 삽니다”

“우리가 이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이분들이 지닌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이분들 안에 있는 선물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라쉬’ 공동체는 바로 그런 곳이 되길 희망합니다. 라쉬 공동체는 장애인들이 어떤 제약과 약점에도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마음껏 노래하며 춤추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울 수도 있는 그런 곳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1964년, 장 바니에는 대규모 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두 사람의 장애인, 라파엘과 필립을 맞아들여 라쉬 공동체가 탄생했다. 그 세 사람은 프랑스 북부의 트롤리(Trosly)라는 마을에서 작은 집을 마련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일하며 웃고, 함께 기도하면서 축복의 삶을 살아갔다. 공동체는 계속 성장해서, 수십 개 나라에서 수백 개의 라쉬 공동체가 생겨났다. 각 공동체의 중심에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그 곁에는 장애인들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려 장애인들과 삶을 나누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함께 머물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삶의 공동체에서 울려 나온 실화 이야기들을 크리스텔라 부저 수녀님이 엮어서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책을 어린 시절부터의 성당 후배인 조재선 선생님과 함께 옮겼다. ‘라쉬 친구들’ 공동체 이사를 역임한 조선생님은 영어 번역 전문가이자 현직 중학교 영어 교사로서, 성당에서 장애인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매 주일 아침에 정신지체 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만나면서, 조선생님과 학생들은 친구가 되어갔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으며, 때로는 서로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였고, 조용히 침묵 중에 함께 머무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애인 주일학교 교사로 지내는 10여 년 동안 조선생님은 장 바니에가 위에서 말한 것들을 하나하나 몸으로 체험하며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스승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주일학교의 장애인 친구들은 조선생님과 서로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지나도, 선생님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묻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직장에 나가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집이 어디이고, 집안은 어떤지, 자동차는 무슨 차를 타는지 등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들은 한 사람의 인격적 정체성의 바깥쪽에 있는 ‘지칭’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 지칭도 없는 그의 인격적 존재 자체를 받아들여 주고 사랑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생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깊이 수락되어 사랑받고 있다는 신비로운 확신이 들면서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장애인 친구들과의 만남은 그를 깊은 곳으로 더 깊이, 그리고 먼 곳까지 더 멀리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처럼 따뜻하고 진실하며 고요한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 이외에 또 무슨 참된 자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필자는 가끔 조선생님과 만나며 그가 장애인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통해서 겪은 체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러면서 이 책 원본을 알게 되어 거기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했다. 필자는 그중 일부를 번역해서 그때그때 마다의 내 강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생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번역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한 번에 내달려서 번역하는 대신, 우리 마음에 영적인 영감을 주는 이야기들부터 하나씩 번역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주 일상적인 자리에서 이따금 함께 커피를 마실 때나 식사할 때, 그리고 거리를 함께 걸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 나눔을 했다. 그것은 번역 작업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성찰과 명상의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이 책 원본을 복사하지도 않고 필요할 때마다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그 책은 페이지가 떨어져 나가 나달나달해졌고, 소중하고 조심스레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책은 아주 낡아버렸지만, 라쉬의 이야기들 덕분에 우리는 온전한 삶의 가치와 행복이 무엇인지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읽는 이들에게 은은한 감동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선사해 준다.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미움과 분노, 분열과 상처가 만연한 이 세상이지만, 그 어딘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꼭 알리고 싶었기에, 우리는 이 책자를 마지막까지 번역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계 곳곳의 라쉬 공동체 이야기들을 모아서 이 책을 쓴 크리스텔라 부저 수녀님은 미국 서부 지역의 라쉬 공동체에서 오랜 기간 봉사하신 분인데. 우리가 번역한 한국어 책(2018년 9월 27일 출간)을 전해 받고서 참으로 기뻐하셨다고 한다.

이미 아흔이 넘는 고령이었던 수녀님은 그리고 불과 얼마 후에(2018년 11월 2일)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크리스텔라 수녀님에게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의 기쁨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될 만한 일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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