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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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 기독교에 입문하여 전통적 제사 의례와 조상에 대해 다른 인식을 지니고 있지만 매년 조상 묘의 벌초에는 빠지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올해도 예년처럼 벌초를 다녀왔다.

제주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추석 명절에는 못 가더라도 벌초에는 빠짐없이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식에 더하여 어머니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에 대한 안타까움과 죄송함이 나를 깨워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어머님과 이별하고 벌써 일곱 번째 벌초이다. 시간의 흐름으로 마치 새 옷이 낡아 가듯 고운 잔디로 입혔던 어머님의 묘도 퇴락해 가고 있는데, 어머님의 묏등에 기대니, 그 아침, 전화기를 타고 어머니의 위급함을 알리던 요양원 책임자의 다급한 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희미해질 만도 한데... 홀로 둔 죄송함을 감추기 위해 들르던 요양원의 금요일 오후 짧은 단편들이 가슴 한 켠에 굳은살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시골 요양원의 공기와 어머니가 누워있던 그 침상의 내음, 오그라들어 가던 팔다리, 바싹 마른입, 애써 희망을 놓아버린 눈빛....... 아아...  뇌경색으로 말을 닫아버린 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눈빛밖에 없었는데, 나의 자책감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눈빛이 어느 날은 나를 원망하는 듯했고, 어느 날은 애절한 듯 또는 안도하는 듯했고, 어느 날은 외면하는 듯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잠깐 들르던 아들에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을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섬을 떠나 유학하게 되면서, 나는 어머니께 무뚝뚝한 아들이 되어버렸다. 의식의 성장에 따라 우리 형제들을 위한 어머니의 헌신과 노고를 충분히 인식하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무뚝뚝함은 고쳐지지 않았다.

명절이나 대소사로 종종 고향 집을 방문했지만 어머니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이번에 가면 어머니의 얘기를 잘 들어드려야지 했다가도 막상 대하면 건성건성 듣다가 한이 가득한 옛 얘기에 불쑥불쑥 퉁명스러운 말을 뱉어내기 일쑤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짝을 만나서 고향에서 제주식으로 결혼 잔치를 하게 되었는데, 결혼 잔치가 시작되기 전 도새기 잡던 날, 잔치 준비를 도와주던 손길들도 다 각자의 집으로 가버린 늦은 시간에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옛적 궤를 여시고 한 옷 보퉁이를 꺼내셨다.

거기에는 하얀 모시로 지은 수의 두 벌이 있었다. 나와 신부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었다. 장수를 염원하는 제주식 의례라 하시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내 바로 밑 동생 것까지 준비하신 어머니의 정성을 말씀하셨다. 그때도 나는 건성건성 들었다. 

그러다가 간암 투병 중이던 위급하신 아버지를 어머니와 동생이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로 모셨는데, 아버지는 그 밤을 다 지내지 못하고 운명하셨다. 그때도 어머닌 준비해 두었던 수의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 미리 챙기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셨지만, 결국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두셨던 수의를 입히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향 집에서 홀로 지내셔야 했던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내 삶에 바빠서 허덕이던 시절, 고향 동네에서 약국을 하던 제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고향 집을 찾았다.

그날도 어머닌 바다에 계셨고 예고 없이 나타난 아들 모습에 즐거워하던 어머닌 같이 일하던 어르신들에게 자랑하셨다. “잘난 우리 큰아들!” 이에 어머니와 함께 계시던 어르신이 한마디 건네셨다.

“아들덜 잘나민 무시거 헐거니, 어멍은 노릇헌 날 ㅎ、루 어시 맨날 감태 조물레 댕겸세”.

그 어른의 타박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정작 어머니께 꼭 필요한 일을 살피지 못했다. 그 어른이 타박을 뒤로하고 집에 와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어머닌 한 번 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맹심허라! 나 수의를 저 궤에 둬시난, 나 죽거들랑 꼭 그거 입혀주라!” 이번에도 어머니의 간절한 얘기를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병이 깊어진 어머닌 막내와 누나 집을 거쳐 우리 형제들 집을 한 3~4년 전전하시다, 결국, 아는 이 하나 없는 요양원으로 가셨다. 그 과정에 어려운 형편이던 사촌이 우리 고향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사촌에게 어머님이 쓰시던 세간살이들을 창고에 보관하도록 부탁하였는데, 그때 어머니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던 궤짝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가서 직접 찾아봐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문뜩문뜩 어머니의 수의를 떠올리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당부를 막연하게 미뤄두었다.

미뤄두었던 당부가 잊히질 즈음에 올 일이 오고 말았고, 그제야 나는 허둥거렸지만 너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그 수의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길에서도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셨던 수의를 입혀드리지 못했다.

이런 불효자식이 어디에 있을꼬? 어느덧 7년이 지났지만, 한 번씩 고향의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어머니의 당부는 되새겨지고 부실한 자식의 후회와 한탄은 더욱 깊어만 간다.

글. 전북대학교 약학대학 정재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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