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전북대학교 약학대학 정재훈교수
사진. 전북대학교 약학대학 정재훈교수

늦었지만 어설픈 저의 지난 서술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와 함께 새해인사를 드립니다. 올해도 모두가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들에서 보람을 만끽하시길 기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설은 일 년 중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설빔과 맛난 차례 음식들, 거기에 더하여 추석 명절에는 없는 세뱃돈까지... 더 행복한 것은 설날에는 어머님이 하루 종일 집에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 제주섬의 대다수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하여 휴일도 없이 들과 바다에서 힘든 노동을 감당하였었다. 평상시에는 자녀들과 오순도순 정을 나눌 여가가 없었다. 비오는 날이나 명절에서야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평상시에도 종종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지만, 행복을 실감하던 시간은 명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행복감은 “내가 귀한 존재”라는 느낌에서 유래하였다고 여겨진다.

내가 별로 잘난 것도 없고 학교 성적이 우수한 아이도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설빔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고 나의 못남을 지적하거나 무시한 적이 없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시고 약간은 허황된 내 얘기를 믿어주셨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셨던 분은 나의 어머니이시다. 나의 자존감(self-respect)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격려와 믿음에 기초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자존감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이었고, 그 자존감이 꿈을 꾸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였던 것 같다.

자존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조건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존감 즉 self-respect는 스스로 존중하는 감정이다. ‘respect’는 ‘있는 그대로 본다.’라는 뜻의 라틴어 ‘respectare’에서 유래 됐다고 한다.

‘존중’할 구체적 이유를 열거할 수 없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생명 자체를 존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절대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그 존중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난 이래 비교되고 비교하며 살아왔고 지금까지 스스로를 비교하는 일에 체화되어 있다. 순간순간 타인 또는 타 그룹과 비교를 통하여 자부심을 느끼거나 자존심이 강화되는 경험을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그룹에 비교하여 뒤떨어 졌다고 판단되면 열등감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자부심과 열등감, 우월감은 상대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자존감이 절대적 관점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나’는 여럿 중 하나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대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는 없다.

‘나’는 고유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 비교하거나 비교 받을 이유가 없다. 물론 각자가 비교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고귀한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이나 조직, 국가, 사회를 위한 희생도 오로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지 강요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비교에서 벗어나 온전히 스스로를 존중할 때 잔잔한 행복감이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주변을 무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나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생명도 나를 존중하는 만큼 존중할 때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자존감과 우월감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 또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다수는 우월해지기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거나 본인이 우월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드는데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월감’은 종종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사회적 포상시스템도 우월감을 자극하는 제도이다. 서로 간에 우월하기 위한 무한 경쟁이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견인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경쟁이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과 지상에 있는 모든 공동체는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끝없는 경쟁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스포츠 경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뿐만 아니라 관중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경쟁하고, 승자는 기쁨을 만끽하며 패자는 슬퍼한다. 그러나 그러한 우월/열등에 기초한 기쁨이나 슬픔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월/열등이 근원적 행복의 요소가 아니라 상황적·일시적 쾌감을 유발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코로나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우수한 방역체계와 국민들의 적극적 방역 참여로 다른 나라에 비하여 피해가 적음에 자부심을 느꼈고 상대적 우월 의식을 표현했었다. 잠깐 행복감을 느꼈지만 어디로 새는지 모르게 그 행복감은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선민사상’이나 ‘America First’, ‘중화사상’을 외치곤 한다. ‘자존감’을 바르게 설명할 책임이 있는 종교 단체들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의 베드로전서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들에선 이 구절을 자신들이 ‘선민’이거나 ‘우월적 그룹’임을 주장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우월감의 뒷면에는 열등감이 존재한다. 우월한 존재나 그룹이 있다는 것은 열등한 존재나 그룹이 있다는 반증이다. 항상 행복의 뒷면에 불행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우월감으로 즐거워하고 있을 때 열등감으로 슬퍼하는 이웃이 있다.

우월감은 차별과 계급을 조성하여 타 생명을 학대하려는 성향을 나타낸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개인이나 그룹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 개인이나 그룹을 무시하고 지배하려는 시도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다.

 각설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은 각자가 올바른 자존감과 함께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다. TV 속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확산에 따른 걱정과 함께 대선 후보자들과 지지자들의 우월성 경쟁이 한창이다.

각자의 자대와 체중계로 상대방을 달아보고, ‘달아보니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면서 웃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행복하지 않다. 가끔 “고운 밥 먹은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제주 섬놈이 이나마 사람구실하면서 사는 것은 전적으로 “내 어머니가 세상에서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셨던 마음과 믿음”덕분이다. 소소한 행복감과 뿌듯함이 밀려올 때마다 더욱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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