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바티칸 박물관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다섯 번째 그림은 네 번째 그림에 이어 여전히 인간의 창조를 묘사한다. 구약 성경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27절)고 짧게 언급한다. 이에 비해, 2장에서는 더욱 자세한 묘사가 나타난다. 사람의 창조 이후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2,20)를 찾아주기 위해 여자의 창조가 이루어진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다음의 성경 대목을 잘 묘사한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옛말이 있다. 중국 양나라 무제 때 화가 ‘장승요’라는 사람이 용 두 마리를 그렸는데, 거기에는 웬일인지 눈동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궁금히 여긴 사람들이 화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그러자 화가는 ‘만일 자기가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즉시 살아서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사람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가가 마침내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자, 천둥 번개가 치면서 용이 살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반면에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화폭에 그대로 남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중앙 천장 벽화 중 세 번째 그림은 구약 성경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둘째 날과 셋째 날 이야기를 묘사한다. 첫째 날에 이루어진 빛의 창조가 시간적 질서의 창조를 의미한다면, 둘째 날부터는 공간적 질서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한 빈 공간에 물이 가득 찬 상태를 묘사한다.고대 근동의 우주론적 세계관에서, 홍수처럼 다스려지지 않은 물이란 곧 혼란과 죽음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물로 뒤덮여 있는 세상이란 공간적 무질서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제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바티칸 교황청 안에는 귀중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박물관(Vatican Museums)이 있다. 이 유명한 박물관의 백미는 그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라 할 수 있다.시스티나 성당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 선거인 콘클라베(conclave)의 장소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여기에는 서구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그린 프레스코 벽화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저서 정치학(기원전 328년)에서 “인간은 그 본성상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는 인간이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고립된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인 것이다.이러한 사회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관계적 인격성’을 고찰할 수 있다. 하나의 ‘인격’이란 독립적 개별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관점까지도 포함해 통합적 관점에
인간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상실의 체험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을 꼽아본다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과 상실의 체험, 혹은 자기 자신의 질병과 장애로 인한 좌절과 상실의 체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가는 절망적인 상실 체험 등이다.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질병이란 인간의 육체가 그 본래적 상태로부터 일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적인 범위 안에서 조절되지 않을 때, 혹은 세포가 정상적 상태를 벗어나 변형을 일으킬 때 심각한 질병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사실, 인
스위스 출신의 정신의학자 엘리사벳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는 저서 인간의 죽음(On Death and Dying)에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의 다섯 단계에 관하여 설명한다. 이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중환자들과의 직접 면담에 기초해 만들어진 저서이다. 모든 이가 반드시 이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인간이 죽음의 과정에서 보이는 첫 반응은 ‘거부’(denial)와 ‘고립’(isolation)이다. 주변에서 암
오늘날의 사회에서 ‘치유’(healing)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을 반영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였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이룩된 현대 디지털(digital) 문명의 기능적 효율성과 편안함의 이면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됨을 체험하기도 한다.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물질적이고 가시적 성취를 통해 많은 안락한 혜택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그 어떤 정서적, 정신적, 영적 공허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
1986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신의 유다인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은 그의 자전적 소설 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악몽과도 같은 고통의 체험을 이야기한다.전쟁이란 극한 참상 속에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횡행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비인간적 조건 속에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기막힌 현실을 몸소 보고 겪게 되면서, 엘리 위젤은 자신의 깊었던 신앙심이 흔들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그는 죄 없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여러 해 전의 어느 더운 여름날, 몇몇 제자와 함께 소백산 등반을 갔다가 폭우를 만나는 바람에, 본래 계획했던 종주 일정을 채 마무리하지 못하고서 부득이 하산해야만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충북 단양 쪽으로 내려왔다가, 불현듯 발길을 돌린 곳이 단양과 인접한 강원도 영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