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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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상실의 체험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을 꼽아본다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슬픔과 상실의 체험, 혹은 자기 자신의 질병과 장애로 인한 좌절과 상실의 체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가는 절망적인 상실 체험 등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질병이란 인간의 육체가 그 본래적 상태로부터 일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혈압이나 혈당이 정상적인 범위 안에서 조절되지 않을 때, 혹은 세포가 정상적 상태를 벗어나 변형을 일으킬 때 심각한 질병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인체에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자연적 복원 능력이 있다. 골절이 발생해도 뼈를 잘 맞추어 깁스 등으로 고정해놓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부러졌던 뼈가 다시 붙게 된다. 또 상처 났던 피부에도 소독 후 붕대를 감아놓은 후 잘 관리하며 기다리면 새살이 돋아 회복된다.

그런데 심각한 질병이란 인체의 상처가 이러한 자연적 복원 능력의 범위와 한계를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치료적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본래적 상태로 다시 돌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포의 변형으로 인한 암의 발생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만일 오랜 병고로 인해 쇠약해진 환자의 육체적 상태가 본래적 상태로의 자연적 복원 능력 밖으로 일탈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제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를 대면하고 수용하면서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의 복원을 시도할 필요성을 마주하게 된다.

기도와 명상 등을 통해서, 혹은 영적 돌봄 제공자(spiritual care-giver)와의 인격적 만남과 영적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룩한 실재와의 초월적 의미 통교가 이를 가능케 한다. 이를 통해 환자는 자신의 생명 안에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영적 손길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영적 통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을 통해서 쇠락해진 육체적 상황 속에서도 환자는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근원적 존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영적 돌봄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전인적 통합이다.

이처럼 본래적 온전함(wholeness)과 충만함(fullness)의 체험을 하게 된다면 환자는 비록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상태, 심지어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조차도 자신의 품위와 존엄성(dignity)을 되찾고 내적 평화(inner peace)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샬롬’(shalom)은 어원적으로 ‘충만함’ 혹은 ‘온전함’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진정한 평화의 회복은 바로 온전함의 체험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의학적 치료와 영적 돌봄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런 ‘온전함’을 지향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의 의사이자 영적 돌봄 전문가인 다니엘 설마시(Daniel P. Sulmasy)에 의하면, 누군가를 ‘치유한다’(heal)는 말 자체가 어원적으로 ‘온전하게’(whole) 한다는 뜻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2009년 가을, 캄보디아의 교회 공동체에서 온 소년소녀들의 전통춤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축복 춤’이었다. 휠체어에 탄 일곱 명의 장애우 어린이들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데, 그들의 뒤에서 또 다른 일곱 명의 장애 없는 어린이들이 함께 춤을 추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뒤에 서 있는 장애 없는 어린이들이 휠체어를 끌고 당기며 이리저리 돌리면서 춤을 추는 동안, 그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우 어린이들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서 거기에 가득 담겨 있는 꽃잎들을 객석을 향해 뿌려대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진 필자는 곁에 앉아 있던, 그들의 인솔자였던 캄보디아 현지 성직자의 설명을 들었다. 이 춤에는 캄보디아 교회 특유의 신학적 해석이 담겨 있었다.

캄보디아는 오랜 기간의 내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한 곳이다. 그 ‘킬링필드’(killing field)에서의 참상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전 기간 동안 설치된 수많은 대인지뢰들이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고 논밭에서 뛰어놀다가 그 대인지뢰에 걸려 팔다리가 잘려나간 어린이들 중 일곱 명이 지금 무대 위의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상실에 비관하지도 않고 운명을 탓하지도 않으며, 또한 장애 상태에 대하여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런 전쟁의 희생자인 장애우를 하느님께서 특별히 더 사랑하시고 깊은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너무도 충만한 은총과 선물을 받았기에, 그 넘쳐나는 행복을 자신들만 간직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이 바로 ‘축복 춤’의 핵심 의미였다.

그러므로 휠체어에 앉은 장애우 어린이들이 관객들을 향해 뿌리는 꽃잎들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과 풍성한 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설적 전망과 희망이야말로 온전함을 향한 영적 돌봄의 의미를 잘 드러내준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상실의 연속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거룩함과의 통교, 그 초월적인 영적 통교 안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근원적 의미를 찾아나갈 것이다.

온갖 깨어짐과 상실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도 나를 다시 일으키는 영적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체험을 통해 온전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를 소망해본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영적 돌봄을 스스로 살아가고 실천하는 사람들 되기를 또한 기대하고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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