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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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의 정신의학자 엘리사벳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는 저서 인간의 죽음(On Death and Dying)에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의 다섯 단계에 관하여 설명한다. 이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중환자들과의 직접 면담에 기초해 만들어진 저서이다. 모든 이가 반드시 이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이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죽음의 과정에서 보이는 첫 반응은 ‘거부’(denial)와 ‘고립’(isolation)이다. 주변에서 암 진단을 받는 분들의 사연 중 특히 안타까운 경우는, 그동안 생활의 고생을 어느 정도 마치고 이제야 비로소 살만하다고 느낄 즈음에 말기 암 판정을 받는 경우이다. 

이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진단이 잘못 나왔다고 ‘거부’하며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보아도 결국 똑같은 결과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말수가 적어지고 지인들과의 접촉을 끊는 등 자신을 ‘고립’시키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다니던 직장도 정리해야만 하고 사회적 모임들 역시 차단된다.

두 번째는 ‘분노’(anger)의 반응이다. “거리를 지나가는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내가?” 하는 질문과 함께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분노감의 표출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행동이기에, 이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때로는 이 분노가 가족들에게 옮아가기도 한다. 따라서 이 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 병문안 가서 하는 위로가 자칫 환자의 분노감을 더 증가시킬 수도 있다. 나름대로 무슨 위로의 말을 하든지 그것이 환자의 깊은 고통을 정말로 함께 느낄 수 없는 것이라면, 환자는 그것을 그저 살아남는 자의 사치쯤으로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이 상태에 있는 분들을 자택이나 병실로 찾아가 만나면서 느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껏 내게 존재해왔던 세상은 내 밖에서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 자신을 통해서 투영된 세상이었다는 점이다. 깊이 성찰해보면, 세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자신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 나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환자는 아주 냉엄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계속해서 존재해나가리란 사실이다. 내가 죽어 떠나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떠들며 계속 그렇게 살아가리란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 순간, 환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버림받은 느낌’이 찾아오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분노감이 표출되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타협’(bargaining)이다. 부정과 분노의 과정을 거치며 아무리 거부하고 화를 낸다 하더라도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환자는 이제 죽음과의 타협을 시도하게 된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은 경우에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 혹은 좋은 일을 위해서 기부할 테니 제발 좀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지향으로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우라면, 필요한 시점까지 조금만 더 살 수 있게 해달라는 타협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막내아들이 지금 고3인데 아주 공부를 잘하니 내년 봄에 명문대학교 입학하는 것까지만 보게 해달라고, 혹은 결혼한 외아들이 3대 독자인데 올 가을에 손주 태어나는 것만 보고 가게 해달라고, 아니면 외동딸이 몇 달 후에 시집가는데 그 결혼식에만 참석하고 떠나게 해달라는 등의 안타까운 소망을 담아서 죽음과의 타협을 시도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네 번째 반응은 ‘우울’(depression)이다. 수술이나 항암치료 등을 거치면서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여전히 악화되는 것을 느낄 때 환자의 좌절감과 우울증이 심해진다. 다가오는 죽음의 힘 앞에서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통증이 심해짐에 따라 그 조절을 위해 많은 약물을 투여하게 된다. 

이 시기에 환자는 점점 희망을 잃어가며 자신이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는 지나간 시간 동안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생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절박하게 느끼는 단계이다. 한마디로 끝없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수용’(acceptance)의 단계이다. 이제 환자는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분노하거나 타협을 시도하거나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며 이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한다. 엘리사벳 퀴블러 로스는 이 상태를 가리켜 “감정의 공백기” 혹은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이라고 표현한다.

필자는 오래 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열흘을 호스피스(hospice) 병실에서 함께 보내며 임종을 지킨 적이 있다. 그전에 여러 환자들을 방문해 임종을 지켜본 적이 있지만, 방문자가 아닌 가족으로서 임종을 직접 지키는 것은 생생하고 절박한 체험이었다. 

그 열흘 동안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이 다섯 가지 반응들이 관찰되었다. 그 반응들이 기계적이거나 획일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고, 반복되거나 순서를 바꿔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최종 단계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이제는 떠나고 싶다.” 하는 것이었다. 아마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투병 끝에 이제는 마지막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이를 지켜보면서 한 인간이 죽음을 수용하기까지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으로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그러기에 어쩌면, 절망을 넘어선 죽음의 수용은 그 어떤, 더 높은 차원의 평화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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