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라는 키워드에 깔린 밑바탕은 바로 공포심이다. 전근대사회의 왕조국가는 범죄자와의 관계 여부를 떠나 무고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포비아를 유발해 민심을 통제하고 억압했다. 무소불위 권력으로 즉각적인 처분을 하면 쉽고 편했다. 

공포 정치의 끝은 파멸이다. 당장은 쉽고 편할 수 있지만 민심은 결국 국왕을 가만두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왕의 목을 자르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그리고 민주정으로 진화한 이유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현대 사회에서도 공포 정치가 발휘될 때가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권력은 쉽고 편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근대적 방법으로 포비아를 조성하지 않지만 우회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제약 업계에서는 식약처의 '현대판 품목 연좌제'에서 이런 행태가 보인다고 성토 중이다. 수탁사 행정처분 기준을 위탁사와 동일하게 하는 입법 예고 이면에 '식약처발 행정편의주의'란 키워드가 깔려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행정편의주의의 이름으로 제약사들의 공포심을 유발해 자신들의 감시 의무를 떠넘긴다는 목소리다. 

게티
게티

식약처가 '위수탁 동일 처분' 입법예고안에서 고친 문장은 단 '한 줄'이다. 복잡하고 어렵지 않았다.

의약품 등 안전규칙 [별표 8]의 행정 처분의 기준은 "위탁자가 위탁ㆍ수탁의 범위와 관리책임 등의 규정을 위반한 경우"="해당 품목 제조 업무정지 3개월"이라고 명시한다.

하지만 입법예고안에서는 "위탁자가 위탁ㆍ수탁의 범위와 관리책임 등의 규정을 위반하여 수탁자가 다음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경우"이란 대목이 나온다. 앞서 문장을 복사-붙여넣기 해서 위탁자로 하여금 수탁자와 동일한 처분(해당 제형 제조업무정지 1개월)을 받도록 규정을 바꿀 예정이다. 

한 줄에 그친 변화지만 업계에 미친 파장은 어마어마하다. 

팜뉴스가 "식약처는 왕조 국가? '품목 연좌제'가 웬 말이냐!", "식약처발 '현대판 품목 연좌제', 결국 피해는 국민이 떠안는다" 제하의 보도를 통해 억울한 제약사들이 속출하고 의약품 품절 대란으로 국민이 피해를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업계에서는 입법 예고안에서 '행정편의주의' 그림자가 엿보인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제약사 임원은 "식약처가 근본적으로 제품들을 쉽고 편하게 관리하겠다는 것이 예고안의 핵심"이라며 "의약품 GMP 위반 문제는 다양한 측면이 있는데 식약처는 이를 무시하고 '일단 걸리면 전부 처분할꺼야'라는 마인드로 접근하고 있다. 위탁을 맡긴 품목 뿐 아니라 아무 상관없는 위탁사의 다른 제품까지 제형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처분하겠다는 것을 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더구나 식약처는 스스로 실사를 통해 위탁사가 생산한 다른 제형까지 꼼꼼히 살펴볼 의무가 있는 국가기관"이라며 "수탁사가 GMP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위탁사 제품에 대해 묻고 따지는 과정 없이 같은 처분을 하겠다는 것은 이런 의무를 방기하고 행정편의주의를 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수탁사들 사이에서도 같은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수탁사 관계자는 "우리는 위탁사 입장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번 입법 예고안은 해도 너무하다"며 "우리 같은 수탁사도 직접 제품을 만든다. 위탁사의 위탁을 받아서 제품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식약처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GMP 위반을 잡아낼 수 있는 구조란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굳이 위탁사 처벌 수위 높이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식약처는 충분히 수탁사의 임의제조를 잡아낼 수 있다"라며 "위탁사가 수탁사 감시를 강화해도 식약처만큼 꼼꼼히 보지 못할뿐더러, 효율성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식약처는 '수탁사 감시 제대로 못하면 너희 제품 전부 날릴거야'라는 사고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더욱 큰 문제는 입법 예고안 이면에 깔린 포비아(공포) 유발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식약처 입장에서 이보다 편한 방식은 없다"며 "자신들이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수탁사가 잘못했다는 이유로 위탁사의 다른 제품까지 날려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방향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이렇게 되면 위탁사는 식약처의 가중 처분을 받을까봐 수탁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수탁사는 위탁사의 압박 때문에 더욱 힘들어진다"며 "이는 식약처가 개별 제품에 대한 감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공포심을 조장해 감시 의무를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식약처 입장에서만 간편한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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