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왕조국가에서 연좌제는 일상이었다. 왕은 범죄자뿐 아니라, 범죄자의 친족 또는 주변인이란 이유만으로 함께 처벌했다. 특히 대역죄(국가 반역)를 저지른 자들은 대부분 연좌제로 처벌됐다. "삼족(三族)을 멸하라" 또는 "구족(九族)을 멸하라"는 왕의 명령으로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다.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제약 업계에서 '연좌제'라는 단어가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식약처가 위탁자의 행정처분 기준을 수탁자와 동일하게 규정한 총리령(의약품 등 안전규칙)을 입법 예고한 이후 곳곳에서 '품목 연좌제'라는 키워드가 들린다. 무리한 규정을 신설해 아무런 죄가 없는 제네릭 품목들까지 행정 처분 대상으로 올려놨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업계가 '연좌제'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서 식약처를 비판한 이유는 뭘까. 입법 예고안 중 어떤 규정이 업계 전반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을까. 해당 규정이 통과할 경우 우리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을까. 팜뉴스가 기획으로, 업계 관계자들에 대한 밀착 취재를 통해 "위수탁 동일 처분 입법 예고"에 담긴 목소리를 연속으로 전한다. 

게티
게티

식약처는 지난 12일 "위·수탁 품목의 위반사항에 대해 위·수탁자를 동시에 행정처분하는 경우 위탁자보다 수탁자의 처분이 더 무거웠으나, 앞으로 위탁자의 행정처분 기준을 현행 수탁자와 동일하게 규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행 규정(의약품 규칙:개별기준의 제2호 자목 1)에 따르면, '수탁자'가 제품 표준서 및 제조관리기준서 등을 작성·비치하지 않거나, 제조지시서 제조기록서 또는 시험성적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허위 작성한 경우 해당 '제형'에 대한 제조 업무정지 1개월 처분을 받는다. '위탁자'는 '품목'에 대한 제조업무 정지 3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반면 입법 예고안이 시행될 경우 위탁자 역시 수탁자와 동일하게 '제형'에 대한 제조 업무 정지 1개월 처분을 받는다. 단순히 위탁을 맡긴 품목 뿐만 아니라, 이제는 위탁사가 취급해온 제형 전체에 대한 처분이 내려진다는 뜻이다. 

업계에선 '현대판 연좌제'가 부활했다는 지적이 들린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 제약사 임원은 "식약처가 상황과 사례별로 동일한 위반인지 개별적인 위반인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이번안은 이같은 방향과 완전히 괴리된 느낌"이라며 "위탁사가 위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은 식약처판 품목 연좌제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업계 관계자도 "위탁사들이 억울할 수밖에 없다"며 "해당 제품을 제조한 장본인은 수탁사인데 그 제품이 걸렸단 이유로 위탁사의 제형까지 모조리 제조 업무 정지를 하겠다는 것은 회사보고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위탁사의 같은 제형에 어떤 제품이 있을 줄 알고 죄없는 제품까지 건드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정 예고"라고 성토했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수탁사가 생산한 A (정제) 제품에 문제가 생길 경우 위탁사는 A 품목에 대한 제조 업무 정지 1개월을 처분을 받았고 수탁사는 공장의 '정제' 전체의 생산라인이 3개월 동안 '스톱'됐다. 

하지만 입법 예고안 시행된다면 위탁사의 '정제' 제품 전체에 대해 제조 업무 정지 3개월 처분을 받는데, 이렇게 되면 지금껏 품질에 문제가 없었고 오랫동안 써왔던 약들이 같은 제형이란 이유로 제조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된다는 것. 

위탁사의 수탁사 관리에 잘못이 있더라도 '죄'에 대한 책임은 위탁을 맡긴 품목이 져야 하는데, 전혀 관계 없는 다른 제품까지 불똥이 튀는 것 자체가 왕조 시대의 연좌제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위탁자의 책임을 강화한다"는 것이 식약처가 밝힌 입법 예고안 취지지만 위탁사 입장에서 수탁사가 은밀히 행해온 약사법 위반 행위들을 24시간 동안 감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앞서의 임원은 "위탁사도 수탁사의 제조소 audit(심사)를 나간다"며 "하지만 수탁사 내부의 QA(품질 보증) 담당이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면 제조 기록서에도 남아있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자료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록이 없는 상황인데다 내부고발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기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밝혔다.

이어 "더구나 우리는 식약처처럼 공권력이 없기 때문에 수탁사와의 계약 범위 내에서만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며 "식약처도 제조소 실사 과정에서 면밀히 들여다보지 못한 건들이 많다. 더구나 자신들 조차 회사의 내부 고발로 임의 제조를 잡아내는 상황인데 우리 위탁사들이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아내겠나. 수탁사의 잘못을 감시하지 못했다고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만큼 억울한 일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식약처 의약품관리과 관계자는 "따로 의견을 내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팜뉴스는 이번 입법 예고안에 대한 식약처와 업계 목소리를 후속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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