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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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아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터이니

[팜뉴스=최선재 기자] '빌베리 건조엑스' 판결을 분석하면,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휴정(서산대사)의 시구가 떠오른다. 제약사들은 그동안 정부 상대의 소송에서 연패를 하며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이번에 1심에서 승소한 국제약품, 삼천당제약, 영일제약, 한국휴텍스제약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과한 해석이 아니다. 1심 재판부는 복지부와 심평원의 빌베리연조엑스 급여 삭제 처분을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므로 재량권을 일탈·남용하여 위법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심평원이 줄곧 '약제 급여 적정성 재평가' 기준으로 내세운 확고한 기준에 대해 부당하다고 결론내렸다. 그것은 바로 임상적 유용성 평가를 위한 근거 자료인 'SCIE-RCT 임상문헌'이다. 재판부가 복지부와 심평원이 SCIE-RCT 임상문헌을 고집하는 것이 객관성을 결여했다고 명토 박은 것이다.

그렇다면 휴정의 시구처럼, 판결문에 적시된 재판부의 논리가 다른 제약사들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까. 국제약품 등 4곳의 제약사가 남긴 발자국은 어땠을까. 팜뉴스가 지난 보도에 이은 후속으로, 이번 판결의 '숨은 일인치'를 전한다.

2021년 2월 복지부가 제시한 공고에 따르면 약제 급여 적정성 평가는 '임상적 유용성'- '비용효과성'- '사회적요구도' 순서로 이뤄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최우선 트랙은 '임상적 유용성'이다. 임상적 유용성을 인정 받지 못하면 재평가 여정이 험난하기 때문이다.

임상적 유용성에 대한 '1차 평가' 기준은 "교과서, 임상진료지침, HTA보고서"다. '2차 평가 기준'은 "SCI, SCIE 등재 학술지에 게재된 RCT 문헌 검토"다. 즉, SCIE급 등재 학술지에 게재된 무작위배장임상시험 데이터가 아닐 경우 2차 평가에서 임상적 유용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복지부와 심평원의 입장이었다. 

참고로 SCI(Science Citation Index)는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을 뜻하고, SCIE(Science Citation Index Expanded) 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확장판을 뜻한다. 2020년 1월 3일 SCI와 SCIE가 통합됐다. RCT(Randomized Controlled Trials)는 무작위배정임상시험을 말한다.

심평원 약평위는 "1차 평가 결과 2종의 교과서에 언급은 있지만 권고 수준이 불분명하고 임상진료지침과 HTA 보고서에 언급이 없다"며 빌베리건조엑스의 임상적 유용성을 '불인정'으로 평가했다. 

2차 평가에서도 "SCIE-RCT 임상 문헌에 언급이 없고, RCT 임상문헌에 언급은 있지만 효과가 '불분명'하다"고 결론내렸다. 결국 빌베리건조엑스는 RCT 임상문헌에 대해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결국 복지부는 2021년 11월 제25차 건강보험정책심의원회를 열고 약제 급여 재평가 대상으로 오른 빌베리건조엑스 성분에 대해 급여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임상적 유용성' 근거가 미흡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국제약품·삼천당제약·영일제약·한국휴텍스제약은 복지부장관을 상대로 '약제 급여 목록 및 급여 상한금액표 일부 개정' 고시를 취소해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했다. 제약사들은 결국 지난해 11월 승전보를 전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이들 제약사는 처절하게 SCIE -RCT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복지부가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며 "피고(복지부) 측은 별다른 법령상 근거 없이 임상적 유용성의 근거자료를 SCI, SCIE' 등재 학술지에 게재된 'RCT 임상문헌'에 한정했는데, 이는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설정한 것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였다. 

먼저 재판부는 "원고들이 제출한 임상문헌 중 상당수는 SCIE 등재 학술지에 게재되지 않거나, RCT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하지 않은 임상문헌이라는 이유로 임상적 유용성 평가에 반영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지만 피고(복지부)와 심사평가원이 급여 적정성 재평가 기준 설정에 대하여 상당한 재량을 갖더라도, 이러한 기준 설정은 객관적인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근거중심의학’의 정착을 위해 의학문헌의 신뢰 수준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어 보이긴 하나, 그렇다고 SCIE-RCT 임상문헌이 아닌 경우 임상적 유용성 평가를 위한 근거 자료에서 전적으로 ‘배제’하고 이를 보충적으로 살펴보지도 않는 방식은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재판부가 근거로 제시한 논지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재평가 자료로 ‘SCIE-RCT 임상문헌’만이 요구된다는 명시적인 규정을 찾기 어렵다. 

둘째, 피고 측이 약제의 요양급여대상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SCIE-RCT 임상문헌만을 인정한 선례도 없다.

셋째, 명시적인 규정과 선례가 없는 상황에서 피고는 2021년 2월 재평가 공고를 통해 임상문헌 중 ‘SCIE-RCT 임상문헌’만을 인정한다고 공고했다. 그로부터 불과 15일 만에 임상적 유용성 판정을 위한 근거자료로 SCIE-RCT 임상문헌을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제약회사 등 이해관계인의 예측가능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넷째, 해당 약제들이 오랜 기간 임상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것과 해당 약제의 효능에 관하여 SCIE-RCT 임상문헌이 존재할 가능성은 별개의 문제로 이는 연구자의 개인적인 관심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에 불과하므로, 사전에 별다른 예고도 없이 SCIE-RCT 임상문헌만을 임상적 유용성의 근거 자료로 요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중요한 사실은 재판부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약처 품목허가 인정 근거를 인용하면서 적극적으로 제약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의약품 품목허가를 함에 있어 근거자료로, 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게재된 자료 외에도 대학 또는 연구기관 등 국내외 전문기관에서 시험한 것으로서 기관의 장이 발급하고 그 내용을 검토하여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자료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당해 의약품의 허가국에서 허가신청 당시 제출되어 평가된 모든 약리시험 자료로서 허가국정부가 제출받았거나 승인하였음을 확인한 것 또는 이를 공증한 자료도 인정하고 있다(의약품의 품목허가·신고·심사 규정 제7조 제5호 가목)"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심지어 약제의 요양급여대상 결정에 관한 평가규정 ‘의약품 경제성평가 지침’도 비뚤림의 가능성이 작은 연구 설계인 RCT 임상문헌을 사용할 것을 권장할 뿐 SCIE-RCT 임상문헌에 한정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RCT 임상문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 관찰 연구(코흐트연구, 환자 대조군 연구) 등 자료를 보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기등재 약제의 급여 적정성을 재평가함에 있어 SCIE-RCT 임상문헌 이외의 임상문헌을 근거자료에서 배제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전했다. 

특히 재판부는 복지부와 심평원이 오로지 SCIE-RCT 임상문헌만을 기준으로 내세워 제약사들이 재평가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고 못박았다. 

재판부는 "국내 임상문헌의 상당수는 RCT 연구가 아닌 비무작위 연구(non-randomaized study)로 보이는데, 임상적 유용성 평가를 위한 근거자료로 SCIE-RCT 임상문헌만을 인정할 경우, 피고의 급여 적정성 재평가 대상 약제 선정만으로도 해당 약제의 요양급여 지위가 박탈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건강보험 재정 절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등재된 약제의 급여 적정성을 재평가함에 있어 신규 등재하는 경우와 달리 SCIE-RCT 임상문헌을 요구함으로써 심사강도를 높게 설정하는 것도 일견 가능해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하지만 이 사건 평가규정 등 관계 규정을 정비하거나 간담회 등을 통해 제약사 등 이해관계인들에게 사전에 그 필요성을 주지시키고, 제약회사 등으로 하여금 학계·연구기관과 협업하여 해당 약제에 대하여 SCIE-RCT 임상문헌을 갖출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지 않은 채 그 외 다른 임상문헌을 근거자료에서 일체 배제한 것은 합리성을 결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그동안 약제 급여 재평가의 공고한 벽으로 작동해온 확고부동한 논리에 일종의 균열이 생겼다는 측면에서 이번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형 제약사 약가 담당자는 "1심 판단이라고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복지부와 심평원이 내세운 SCIE-RCT 임상문헌이란 기준에 대해 재판부가 따끔한 지적을 한 것이다. 제약사들의 처지와 예측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행정편의적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해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물론, SCIE-RCT 임상문헌은 신뢰할만한 통용된 기준은 맞다"며 "하지만 그 어떤 예측 가능성도 없이 몇십년만에 갑자기 하나의 기준만을 '답정너'로 정해놓고, 제약사에게 자료 준비를 위한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점을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의 논리가 향후 소송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의 약가 담당자는 "SCIE-RCT 임상문헌은 그동안 제약사들이 깨드리지 못한 '벽'이나 다름 없었다"며 "판결문의 다른 대목도 중요한 부분이 많지만 향후 소송에서 이번 1심 재판부가 내린 결론이 소송을 대응하는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같은 성분으로 다른 제약사들이 낸 소송에서는 제약사들이 완패를 했다"며 "때문에 이번 판결에 참여한 제약사들이 남긴 흔적들이 더욱 의미는 깊을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중장기계획 없이 오로지 주관적인 기준을 내세워 재평가를 진행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향후 소송 추이를 지켜봐야겠지만 업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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