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갑 징수상임이사(국민건강보험공단)

올해는 전국민 건강보험 도입 30주년이 되는 해다. 전 국민 의료보험이 태동하기 시작할 무렵인 1987년, 전종갑 징수상임이사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했다. 그는 건보공단의 ‘살아있는 역사’다. 무려 30년 동안 건강보험 정착과 재정안정성 확보에 기여해왔기 때문이다. 퇴임을 맞은 ‘32년 공단맨’ 전종갑 이사를 만났다.

 

전종갑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전종갑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1977년 건강보험은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했다. 건강보험은 1989년 도시지역 의료보험 실시를 계기로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다. 그 이후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전종갑 이사는 전국민 건강보험 30주년의 ‘의미’에 대해 강하고 힘찬 어조로 “모든 국민에게 건강권에 대한 평등이 이뤄진 것”이라며 “과거에는 500인 이상 사업장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았다. 이들은 월급도 많은데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아 수입은 많고 지출이 적었다. ‘부익부’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은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이 적었고 회사가 불안정했다”며 “보험이 되지 않아 돈이 없으면 치료를 포기했다. ‘빈익빈’이었다. 의료 제도가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전국민 건강보험 도입으로 사회 불평등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됐다”고 강조했다. 전국민 건강보험 제도의 안착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은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을 받고 있다. 전종갑 이사는 의료기술 수준의 질적 향상 역시 ‘전국민 건강보험’에서 기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에 의료시장이 협소했다”며 “보험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은 치료를 포기했다. 큰 병에 걸리면 논밭을 팔았다. 아이들 교육도 못 시키고 가난이 대대로 이어졌다. 의료 시장에 수요 자체가 적었던 이유다”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모든 국민들에게 건강보험 혜택이 돌아가면서 병원 문턱이 낮아졌다. 수요가 늘면서 공급 역시 급증했다. 공급이 증가하고 우수한 의료 인력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합하면서 의료수준이 획기적으로 올라갔다”고 덧붙였다.

≫ 구두 밑창이 닳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전국민 건강보험 과도기’인 1980년대, 전종갑 이사는 제도의 정착을 위해 구두밑창이 닳도록 뛰고 또 뛰었다.

그는 “당시 사회보험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높지 않았다”며 “대학을 졸업해서 많이 배운 사람도 건보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왜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가입’이라는 개념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군사 정부 시절이란 정치적 환경 때문에, 국민들도 건보제도의 당연가입 절차가 비민주적이라고 오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도 자체에 대한 거부가 많았다. 건강보험증을 발급해서 집으로 보내면 반송이 됐다”며 “보험료도 당연히 잘 내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자동이체가 없었다. 보험료 미납자들을 낮에 가면 만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전종갑 이사는 “저녁에 특별징수반을 꾸려서 가가호호 방문해서 징수 작업을 벌였다”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국민들에게 제도를 장시간 설득시켜야 했다. 그래야 돈을 냈다. 야근을 많이 했던 이유”라고 밝혔다. 정치적 환경과 물리적 시스템 때문에 초기 제도 안착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

건강보험 제도의 뿌리는 ‘재정’이다. 건보재정은 언제나 전국민적인 관심사인 이유다. 2002년 유례없는 건보재정 위기가 도래했다. 정부가 국민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을 시행할 정도였다.

≫ 건보 재정 위기, ‘구원투수’ 등장…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전종갑 이사가 건보 재정 ‘구원투수’로 등판한 시기다. 그는 CP(기업어음) 발행으로 건보공단이 곳간을 넉넉하게 채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종갑 이사는 “1990년부터 건보 통합 논의가 촉발됐다. 통합여부를 두고 10여년간 논쟁이 있었다”며 “98년도부터 통합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자, 직장조합들이 보험료율을 인상하지 않았다. 어차피 통합을 할 것인데 적립금을 가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건보 재정의 위기가 시작된 배경”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재정이 파탄났다”며 “2001년도 공단 재정관리실 자금운영부 차장으로 근무했다”며 “당시 직원들 사이에는 국가가 도와줄 것이기 때문에 공단이나 공사가 부도는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전종갑 이사는 “하지만 IMF 이후 은행이 줄줄이 부도가 나던 시절이었다”며 “자구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마이너스 통장을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율이 너무 높았다. 2000년 6월 29일, 제가 최초로 공단에 자금을 차입했다. 차입의 방법을 CP로 했다. 공단이 CP를 발행하면 투자자들이 CP를 샀다. 이율을 떼고 공단 계좌로 입금을 해주는 방식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CP를 발행했더니 발행기간이 짧으면 이자가 3%, 길면 5% 내외였다. 마이너스 통장의 절반 수준의 이자로 자금을 조달한 것이다. 결국 3년 동안 차입을 하고 4년차에 전부 돈을 갚았다”고 설명했다.

전종갑 이사의 획기적인 CP 발행으로 건보공단은 재정위기의 거친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재정안정 대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보건복지부 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그야말로 ‘재정전문가’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 후배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 “오로지 ‘국민’ 생각해야”

전종갑 이사는 7월 10일 퇴임했다. 그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마지막 메시지는 뭘까.

“저는 직원들에게 ‘공단보다 열심히 하는 직원은 없다’고 늘 격려한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지속가능한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국민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복지부와 같은 조직적 관점이 아닌 ‘가입자’인 국민 말이다. 가입자의 서비스 가치를 재고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하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협업하고 창의와 혁신이란 가치를 이뤄내야 한다. 그것이 공단 직원들이 유념해야할 키 메시지다”라고 강조했다.

전종갑 이사는 1시간 동안 이뤄진 인터뷰 내내, ‘서비스’와 ‘국민’이란 키워드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건보 공단의 ‘살아있는 역사’가 마지막으로 전한 두 개의 키워드에서, 건강보험공단이 그리는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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