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뉴스=김응민 기자] 지난 2007년에 MBC에서 방영된 의학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작중 인물이 궁극적인 의사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온 문구다. "작은 의사는 질병을 고치고 평범한 의사는 사람의 마음을 고치며 진정으로 큰 의사는 사회(국가)의 병까지 고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려면 해당 구성원들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건강한 의사들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든 진료과목이 그렇겠지만, 특히 산모와 아기라는 '두 생명'을 지켜내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더욱 남다르게 다가오는 문구다.

팜뉴스가 최근 파주 야당 모처에서 운정서울여성의원 박정연 원장(산부인과 전문의)을 만난 배경이다. 박 원장은 <바르고 정확한 진단, 밝고 정직한 진료>라는 슬로건 아래 환자를 최우선에 두고 진정한 의미의 '환자중심주의(Patient centricity)'를 실천하고 있다.

팜뉴스는 박정연 원장에게 의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경험,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과 앞으로의 포부 등을 들어봤다.
 

#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꿈꿨던 장래희망 "의사가 되고 싶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흉부외과 의사가 끌렸다. 집안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흉부외과가 어떤 과인지도 자세히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중학교 재학 중 진로상담을 하면서 당시 영어 선생님께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셨다. 당시 소위 특목고라 불리는 특수목적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열풍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외고를 진학하고 보니 학교 특성상 어문계열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당시에는 문과생이 이과 계열의 대학교를 가기 어려운 구조였고, 당연히 의대에 지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의대를 가려면 자퇴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수2 과목을 따로 공부해서 이과 계열로 수능을 응시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학도 어문계열로 진학했고 졸업 이후에는 시대의 흐름에 적당히 타협하며 당시 주목 받았던 미국 공인회계사(AICPA, American Institute of Certified Public Accountants)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자격증을 바탕으로 금융회사에 취직해 직장 생활을 했다.

# 기적처럼 열린 의전원, 10년만에 '늦깎이 의사'의 길로

그러던 어느 날, 회사를 퇴근하다가 하늘을 보며 알 수 없는 회의감과 자괴감이 들었다. '꿈은 정말 이루지 못해서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마음 속 한 편에 여전히 의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국내에서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이 생긴 것이다. 의전원은 의과대학에서 본과 4년 과정을 가르치는 4년제 전문대학원으로 졸업하게 되면 의사국시에 응시해서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의전원에 입학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인 MEET(Medical Education Eligibility Test, 의학교육입문검사)를 준비해 2007년에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남들보다 10년이 늦었지만 돌고 돌아 결국은 '의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것이다.

# 운명처럼 선택하게 된 산부인과(Obstetrics & Gynecology)

저는 남들과는 다른 조금 특이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의전원에 입학하기 한참 전인 1999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캐나다 벤쿠버로 이민 간 언니에게 훌쩍 날아갔다. 당시 언니가 임신 중이었는데 약 6개월 간 같이 지내며 임신과 출산 과정을 모두 함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여 년도 더 된 일이지만 당시 캐나다는 산모를 위한 시스템이 너무 잘 갖춰져 있었다.

산부인과 용어 중에 'LDR'이라는 단어가 있다. 진통(Labor)과 분만(Delivery), 회복(Recovery)을 한 곳에서 진행하는 것인데, 이처럼 산모가 이동하지 않고 LDR 과정을 가족과 함께 한 공간에서 진행하면서 산모와 아기에게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생기고 가족들은 생명 탄생의 소중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LDR을 각각 다른 장소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캐나다에서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던 것이다. 이후 언니가 둘째와 셋째를 출산할 때도 언니를 찾아가 분만 과정을 도왔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산부인과에 남다른 애정이 생기게 된 것 같다.

사실 산부인과는 과목 자체가 어렵고 힘든 점은 많은 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크지 않은 편이다. 수가도 낮은 편이고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의 위험도 있어 지원율이 그리 높지 않은 비인기 과목이다.

그렇지만 산부인과는 다른 과목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바로 산부인과 안에서 환자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모든 전공과목들은 대척점에 서 있는 과목이 있다. 예를 들어 내과와 외과, 비뇨기과와 신장내과, 호흡기내과와 흉부외과와 같은 형태다.

하지만 산부인과는 내과적인 약물 치료부터 외과적인 수술의 영역까지 모든 것들을 산부인과 내에서 해결한다. 환자를 시작부터 끝까지 케어 할 수 있다는 차별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 1만례 이상의 수술 경험 & 대형병원을 두루 거친 10년 이상의 경력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산부인과 전공의 과정을 마친 뒤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펠로우 (Fellow, 전임의) 를 하게 됐다.

산부인과는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산과(Obstetrics)'와 전반적 여성질환을 보는 '부인과(Gynecology)', 그리고 난임 및 호르몬을 보는 내분비과와 여성 비뇨기계통 질환을 다루는 비뇨부인학, 이렇게 4가지 분야로 각각 나뉘어 있는데 저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일명 everyology) 환자를 보았다.

이 과정 속에서 자연분만, 제왕절개 수술, 근종 수술, 복강경 수술, 로봇 수술, 요실금 수술, 호르몬 치료 등 다양한 케이스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감사하게도 진료교수라는 직책까지 맡게 됐다. 이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여성전문병원인 허유재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산부인과 진료과장으로 5년간 근무했다.

허유재병원에서의 경험도 무척이나 의미 있었다. 앞서의 병원들과는 달리 폭넓은 케이스의 환자들을 만나는 기회는 줄었지만, 인품이 뛰어나신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배려심과 이해심, 그리고 산모 및 환자를 대할 때의 마음가짐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최근 들어 일부 병원에서는 환자를 단순히 영리목적으로만 취급해 기업처럼 운영하는 곳도 존재한다. 하지만 허유재병원은 산모와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모든 일들을 처리했고,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사무직원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이상적인 2차 의료기관'이라 생각한다.

# 갑작스러운 아버지와의 이별, 그리고 암

사려 깊은 원장님과 동료 의사들, 간호사들과 함께 바쁘지만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2020년 8월 22일 토요일, 한동안 장마가 기승을 부리다가 그날은 하늘이 너무나도 맑은 날이었다. 코로나19 일일 확진자가 수백명씩 나오면서 위기경보 2.5단계가 발령되어 있어서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모처럼만의 환한 날씨였고, 나는 평소처럼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자전거 타는 것을 워낙 좋아하셨는데 체력이 왠만한 젊은 사람들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나신 편이셨다. 파주 운정에서 임진각까지 자전거로 왕복 4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거리를 쉬지 않고 다녀오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날도 그랬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자전거를 타러 나가셨다가 전방 주시를 하지 않고 중앙선을 침범한 승합차에 그대로 치이신 것이다. 사고 난 도로의 제한속도가 시속 40km 구간이었는데 나중에 블랙박스를 보니 차량 속도가 90km를 넘어 갔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버지께서는 운명을 달리하신 상황이었다. 아버지 시신을 검안하는 과정에서부터 여러가지 일들을 함께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직업적으로 마땅한 도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당시 나의 작은 한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남은 가족들과 항상 힘이 되어주는 주변 지인들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2020년. 개인적으로 매우 아프고 시린 한 해를 보냈다.

그 뒤로는 더 이상의 시련은 없을 꺼라 확신했는데, 또다른 큰 시련이 다가왔다. 이듬해인 2021년 3월,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 주변에 무언가 만져지는 느낌이 들어서 갑상선 초음파를 했는데, 검사를 하는 김에 유방 초음파도 함께 받았다.

유방 초음파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돼 조직검사를 진행했는데 그게 암이었던 것이다.

진단받은 시기가 3월 말이었는데, 당시 나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잡혀 있던 산모들의 스케줄과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 당장 수술하지 않고 한 달을 미뤘다.

원장 선생님은 건강이 최우선이라 하시며 하루빨리 수술 받을 것을 권유하셨지만, 암이 매우 초기 상태였던 것도 있고 앞서의 여러가지 여건들을 고려해 5월에 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았다.
 

# 바르고 정확한 진단, 밝고 정직한 진료

아버지와 예기치 못한 사별, 남은 가족들이 받은 고통과 스트레스, 초기 유방암 진단 등을 겪으면서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소망했던 '의사'라는 꿈은 이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정작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는지 고민했다.

마침 시기적으로도 주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개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련의 이유들로 인해 나의 의사로서 사명감을 좀 더 구체화시켜 환자와 환자 주변 가족까지 모두 아우르는 '건강지킴이'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 중 하나가 바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슬기롭고 다사로이 오늘을 한아름 안자"라는 우리 집안 가훈(家訓)이다.

실력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나거나 대학병원에서 큰 수술을 하는 명의는 아니지만, 정직하고 성실하며 올바르게 환자를 진료한다는 점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특히 유방암을 비롯해 여러가지 질병들을 경험하면서 웬만한 환자들이 마주하는 입원과 검사, 수술, 치료 등의 과정을 온몸으로 배우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바르고 정확한 진단, 밝고 정직한 진료> 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해 11월 청량한 구름과 맑은 우물이 있는 파주 야당에 '운정서울여성의원'을 개원했다.

# 미래의 건강을 책임지는 산부인과, 환자와 가족까지 케어하는 '가족진료' 실천

예전처럼 병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제왕절개나 복강경 수술, 로봇 수술 등을 할 순 없지만, 지금은 저만의 작은 세상에서 훨씬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살아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부인과는 분만과 출산에 대한 인식이 강한데, 사실 1살 여아부터 80살 노인까지 모든 여성이 찾을 수 있는 병원이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으로 자라나고, 이후 젊고 건강한 여성으로 성장해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을 경험하며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갱년기를 겪는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살필 수 있도록 늘 강조한다.

저는 진료를 볼 때,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모든 것들을 가급적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환자의 질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안 대소사나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와 같은 사적인 대화도 함께 많이 나눈다.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환자를 보는 제가 위로를 받을 때가 많다. 환자와 나누는 특별한 공감과 유대감의 시간이 서로서로를 치유하는 '힐링 타임'이 되는 것이다.

본원에서 외국인 환자를 위한 진료를 환영하는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다. '국경없는 의사회'처럼 외국에 나가서 직접적인 봉사 활동은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환자들이 우리들과 똑같은 수준의 양질의 의료행위를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사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남들보다 10년이나 늦게 시작한 '늦깎이 의사'지만, 환자를 위하는 마음과 열정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앞선다고 자신한다. 밝고 바르고 정직하게 따뜻한 가족의 마음으로 아우를 수 있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