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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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그림은 구약성경 창세기 7-8장에 나오는 대홍수 및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메시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에는 나오지 않는 창세기 4-6장의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한다.

지난번에 보았던,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다루는 미켈란젤로의 여섯 번째 그림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이야기를 다룬다, 그 이후 남자와 여자는 두 아들을 낳는다. 형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둘 다 제물을 바쳤으나, 어찌된 일인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만 기꺼이 굽어보시고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시지 않았다. 이에 매우 화가 난 카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살해하였다(4,1-16 참조).

교만과 탐욕에 빠진 인간은 에덴동산의 온전한 상태에서 추방되었으며, 이제 수직적 관계에서뿐 아니라 수평적인 인간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 죄악성을 드러내고 만다. 어떠한 제물이 받아들여지는가는 신적인 선택이며 권한인데, 인간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도전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성찰해볼 수 있는 주제가 있으니, 그것은 카인이 자신에게 다가온 불운에 대응하는 방식에 관해서이다. 알 수 없는 선택에 대하여 카인은 불만을 품고 화를 내고 만다.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4,5b) 그러자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4,6-7)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불운과 불행을 겪을 수도 있다. 사람이 항상 양지에서만 살 수는 없고 때로는 음지를 체험하기도 한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결국 이에 따라 우리 인생의 행로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카인은 자신에게 닥친 이해할 수 없는 불운 앞에서 결국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동생의 피를 흘리게 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혼란에 빠지며 여러 종류의 심리적, 감정적 동요나 불안감에 휩싸이는 때를 체험할 수 있다.

이렇듯 평소의 정상적 심리 상태나 감정적 평온함을 벗어난 동요와 흥분 상태에서는 어떤 성급한 결정이나 과격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 상황이나 그로 인한 심리적, 감정적 파장에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는 내적 자유(inner freedom)와 초연함이다.
 

그림. 아벨과 카인(Abel and Kain)
그림. 아벨과 카인(Abel and Kain)

우리가 체험하는 심리적, 감정적 동요는 분노나 미움과도 같이 설사 부정적 측면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불의한 일을 당하면 당연히 화가 나는 법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내적인 분노와 동요에 사로잡혀 구체적인 외적 행동을 지나치게 할 때에 발생한다. 카인에게 주어진 경고처럼, 죄악의 유혹은 우리의 심리적, 감정적 동요가 이루어지는 곳, 바로 그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다. 우리는 마음의 평온함과 중용(中庸)을 통해 이를 잘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어쨌든, 카인과 아벨의 경우에서처럼 필연적으로 폭력적 결과를 파생시키는 분열과 상처는 교만과 탐욕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늘에 대한 죄악과 인간에 대한 범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성서적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처럼 창세기는 3장 이하에서부터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1-2장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던 주제이다. 인간의 죄악 이후에 인간 세상에는 ‘폭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죄와 벌의 폭력적 구조는 창세기 11장 1-9절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목적과 동기는 바로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4절) 하는 것이었다.

고대의 우주론적 세계관에서 하늘은 곧 신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이렇듯 어리석은 교만에 대하여, 사람들의 말이 뒤섞여 서로 간에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벌이 내리게 된다. 교만과 탐욕은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통교(communication)를 폭력적으로 파괴하여 분열시키게 된다는 것이 바벨탑 설화의 메시지인 것이다.

교만과 분열은 인간의 마음이 가장 왜곡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의 루카 복음서 3장은 구약성경 이사야 예언서 40장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4-6절)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가? 우리 마음 안에 쌓여진 교만의 산과 언덕을 낮게 깎아내린 다음, 그 깎아내린 흙으로써 깊이 패여 있는 분열과 상처의 골짜기를 메울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인류는 이러한 평화를 갈구한다. 교만과 탐욕, 그리고 분열과 상처가 없어진 인간 세상을 꿈꾸는 것은 너무도 지나친 기대일까? 이러한 평화의 세상을 꿈꾸며 상상했던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의 노래(Imagine)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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