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응민 기자
사진=김응민 기자

[팜뉴스=김응민 기자]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자르는 헤어스타일, '삭발'은 예로부터 특별한 목적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행해졌다. 불교에서는 출가를 할 때 세속의 모든 번뇌와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었고, 군대에서는 위생과 통일성, 효율성의 측면에서 군인들의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근대에 들어서는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하거나 결의 또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삭발을 하기도 한다. 앞서의 종교적인 의식이나 효율적인 측면과는 달리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대한약사회 최광훈 회장이 삭발 시위를 단행했다. 약사와 대면 상담이 아닌 화상(비대면)으로 복약상담을 통해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는 '약 자판기(화상투약기)' 도입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약 자판기는 해당 기기를 구입하는 약국에 설치돼, 약국 영업을 하지 않는 심야나 주말・공휴일에 환자와 기기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원격으로 상담한 뒤, 증상에 맞는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기기다.

지난 2019년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실증특례사업으로 선정됐지만 약사회 측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현재, 규제샌드박스 회의 안건으로 다시 한번 상정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강경 투쟁에 나선 것이다.

최광훈 회장은 지난 19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전국 약사궐기대회를 개최하며 "약 자판기는 본질적으로 특정 기업의 수익 창출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며 "기존 의약품 대면투약 원칙을 훼손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은 약 자판기 도입을 결사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8만 약사를 대표하는 대한약사회장이 삭발 투혼까지 보이며 정부 정책에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기자는 궁금증이 들었다. 역대 약사회장 중에서 누가 '삭발 투쟁'을 진행했고, 그 결과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다.

지난 20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니 제31대 대한약사회장을 지낸 김희중 회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희중 회장은 지난 2001년 국내 의료계와 약업계를 뒤흔들었던 '의약분업(醫藥分業)' 논의가 이뤄지던 무렵, 분업 대상에서 주사제가 제외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삭발식을 진행했다. 

당시 개최된 '의약분업 윈칙훼손 저지 결의대회'에서 김희중 회장은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서 제외하게 된다면 의약분업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분업을 계속할 의미가 없게 된다"라며 "의사들이 경구용 제제의 원외 처방을 기피하고 주사제 위주의 처방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해당 사안은 실익을 떠나 원칙의 문제다"라며 "약사회의 많은 양보로 어렵게 도출한 의・약・정 합의가 무너진다면 의약분업에 불참할 수 밖에 없다"라고 덧붙였다.

김희중 회장은 삭발식을 진행한 것과 동시에 시한부 단식농성까지 펼치며 강력한 투쟁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정부가 항생제와 수액제제, 스테로이드제제 등 모든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복지부는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 포함시키게 되면, 기술료와 처방료 등의 수가가 추가돼 재정부담이 커지고 의사와 약사 간의 담합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주사제를 분업에서 제외시켰다.

이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2011년에 대한약사회는 다시 한번 투쟁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가 국민 편의성 증대를 위해 일반약 약국외 판매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

당시 대한약사회장이었던 김구 회장은 '약권 수호'를 외치며 삭발식을 진행했다. 다만, 해당 삭발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채 비공개로 진행됐다. 진정성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대한약사회 측은 "김구 회장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삭발을 결정했으나 삭발을 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보일 수 있어 공개하지 않았다"라며 "자칫 일반약 약국외 판매를 반대하는 목적이 왜곡돼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약사회는 회원 성금 모금과 긴급결의대회, 혈서(血書) 작성 등을 펼치며 반대 운동을 펼쳤지만 결국 이듬해인 2012년에 24시간 편의점에서 안전상비의약품(일반의약품 13품목)이 판매가 허용됐다. 

이후 또다시 10여년이 지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앞서 언급했던 약 자판기 저지를 위해 최광훈 대한약사회장이 삭발 투쟁에 감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대 회장들과 마찬가지로 '실패'였다. 

과기부는 지난 20일 제22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약 자판기(화상 투약기) 등 11건의 실증규제특례 과제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당초 '안건 부결'을 외쳤던 약사회의 목표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아직 구체적인 실행안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지난 2019년 복지부가 제시한 조건부 실증특례 안건과 유사한 수준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로써 과거 20년간 '약권 수호'를 외치며 굵직한 약사 현안들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했던 역대 대한약사회장들의 '삭발 시위'는 모두 실패로 끝나게 됐다. 주목할 점은 아직 비대면 진료와 약 배달, 한약사 이슈 등 약사 사회를 둘러싼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그간 '강경 투쟁'만을 외치며 정부와 국민을 설득했던 대한약사회장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어떻게 하면 약사회의 목소리가 진정으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심도 있게 고민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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