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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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지대’(death zone)란 산소 부족으로 인해 등반의 한계에 마주하게 되는 7.500미터 이상의 산악 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처럼 험난한 곳에서 보게 되는 고산 지대의 풍경, 그 눈 덮인 산들과 계곡의 파노라마(panorama)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의 지대’에서 혹시 보게 될 수도 있는 또 다른 파노라마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는 1978년 사상 처음으로 산소 호흡기 없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8,848m)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후 히말라야 산맥과 카람코람 산맥의 8,000미터 급 열네 봉우리도 모두 무산소 등정으로 처음 올랐던 전설적인 세계적 산악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지대에서 등반 중의 추락 체험에 대하여 어느 의사의 글을 인용해 말한다.

“갑자기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 추락 사고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클라이머(climber)들은 이구동성으로 낙하 중에 수없이 많은 영상들, 특히 그들의 ‘전(全) 생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앞을 지나갔다고 한다. 단란한 식구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며, 지난날의 중요했던 체험이 갑자기 나타나는 등 눈앞에 다가선 파국이 이상하게도 전혀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죽음 직전의 ‘파노라마’ 현상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 자기 생애의 중요한 나날들이 마치 영화 필름을 빨리 돌리듯 생생하게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렇듯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삶의 회고’(life review)는 죽음 직전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의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에서 공통적으로 증언되는 바이다. 그때 떠오르는 기억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장 후회스러우며 부끄러운 부분일 수도 있다고 한다.

1999년에 제작되어 현대 사회에서 해체의 위기에 몰린 가정의 위기를 다루었던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역시 한 인간이 죽음 직전에 맞이하는 체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남자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케빈 스페이시(Kevin Spacey, 1959-)가 총을 맞고 죽어가는 상태에서 독백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삶의 기억을 떠올려 회고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실직당한 후, 아내와의 심한 다툼, 그리고 외동딸과의 상호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인해 심적으로 고통당하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결정적 순간에, 그는 오해로 인해서 뜻밖의 인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가 보았던 것은 어린 시절 보이 스카우트 야외 캠프 때 풀밭에 드러누워서 바라보았던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하늘의 모습, 즉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찬 아름다운 우주의 풍경이었다. 집 앞 길가에 늘어서 있던 노란 빛깔의 아름다운 낙엽들도 또한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과거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백한다. 지금 이 최후의 순간에 느끼는 것은 자신의 보잘 것 없고 어리석었던 인생에 대해 감사함(gratitude)이라고...

누구든 언젠가는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왜 주인공이 죽는 순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에게도 동일한 역설적 체험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분명 자비로움의 체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는 사회적 대의를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투신할 때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으나, 독재자에 의해 양심수로서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 찬찬히 자기 생애를 되돌아보니 큰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낀다고 옥중서한에서 고백하였다. 사실 인간에게는 망각의 은혜가 주어졌기에 그냥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 만일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잊지 않고 모두 생생히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두 다리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파노라마 현상을 통해 자신의 벌거벗은 온 생애가 드러나는 것 자체가 큰 형벌일 수도 있다.

독일의 성서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1934-)는 말한다. “우리가 한평생 쌓아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겨두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연기해 보이던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중지해야 한다.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마치 불과 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시편에는 절절한 고백이 나온다.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30,3) 자신이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때, 과연 어느 누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서 자신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고결하고 완벽한 삶을 살아왔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서시’를 통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한 윤동주(1917-1945) 시인만큼은 예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생애에 대하여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러한 삶마저도 포용하고 용서하는 자비로움의 체험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위대한 사랑과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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