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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케어 영성]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위한 ‘스플랑크니조마이’
[헬스케어 영성]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위한 ‘스플랑크니조마이’
  • 신용섭 기자
  • 승인 2020.11.13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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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건강과 영성 8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필자는 비틀즈(The Beatles)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비틀즈의 전설적인 명곡 ‘렛잇비’(Let it Be)의 가사 중에는 ‘가슴이 미어지는’ 혹은 ‘마음이 부서지는’(brokenhearted)이란 표현이 나온다, 즉, “세상에 살고 있는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the broken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이처럼 큰 시련의 아픔을 겪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내 부서지는 마음의 고통을 진실로 함께 아파하며 공감해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따스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승불교는 ‘자비심’을 강조하며, 유교는 ‘측은지심’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표현은 그리스도교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신약 성경의 복음서들에서는 병자들을 낫게 해주는 치유 기적에 있어 그 동기는 바로 병자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그래서 그렇게 아픔을 깊이 공감하는 자비와 사랑을 가리키기 위해, ‘가엾은 마음이 들다’(to have pity/mercy on~)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참조: 마태 9,35-36; 14,14; 20,34; 마르 1,41; 6,34; 8,2; 9,22; 루카 7,13).

예를 들어, 예리코에서 눈먼 두 사람을 고칠 때,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어’(스플랑크니조마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다.”(마태 20,34) 즉, 그 기적 행위의 동기는 바로 자비(compassion)의 마음인 것이다. 

또한 나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는 이야기는 더욱 감동적이다. 전염성이 강해서, 또 그 질병의 특성 상 위생적으로 청결하지 못해서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어느 나병 환자에게 다가가 직접 손을 내밀어 ‘건드리는’(touching), 그래서 낫게 해주는 매우 ‘감동적인’(touching)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처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스플랑크니조마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0-42)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에서도 이 단어가 나온다.  마치 번개처럼 내려친 자비심이 사마리아인의 영혼을 꿰뚫어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먼저 가던 고결한 이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어원적으로 볼 때, 이러한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는 그리스어 명사 ‘스플랑크논’에서 나왔다. ‘스플랑크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내부 장기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흔히 인간의 내부 장기들을 언급하며 우리의 마음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거나 “간 떨어질 뻔했다”는 표현은 우리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를 묘사한다.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란 표현은 그것이 얼마나 깊게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카로운 고통인지를 드러낸다. 

복음서에서도 ‘영혼이 칼에 꿰뚫리는 아픔’에 대한, 즉, “A Sword will pierce your soul”(루카 2,35)이란 표현이 나온다. 또한 ‘애간장이 녹다’라는 표현은 그 고뇌의 깊은 정도를 알게 해준다.

나아가, ‘애가 타는 아픔’ 혹은 ‘애가 끊어지는 아픔’이란 마치 내 창자가 파열되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 영웅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조에도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어 명사 ‘스플랑크논’은 구약 성경 히브리어의 ‘라하밈’과도 연결된다. 이는 어머니의 자궁을 가리키는 말 ‘레헴’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성애적 사랑을 의미한다. 

사실, 자식의 아픔은 곧 어머니의 아픔으로 그대로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설령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아픔을 잊는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잊진 않는다는 말씀이 구약 성경 이사야 예언서에 나온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49,15)


이처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의 아픔을 그대로 함께 느끼는 지극한 공감과 자비와 사랑은, 설혹 그 물리적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영혼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위로의 손길이 되어줄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기에, 한 인간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던 존재론적 상처, 그 고통의 뿌리가 되었던 상처로부터의 근원적 치유가 이루어진다면, 그 외적인 병고와 아픔까지도 치유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데,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손길을 전하는 사람이 또한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손길을 통해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즉 돌봄 제공자(care-giver)가 되어야 한다. 

각자가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질병’이라는 ‘강도’를 만나 쓰러져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돌봄의 영적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즉 오늘날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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