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핀 동양의 발레리안...마타리의 향기와 진정의 과학
이용섭 교수 [칼럼]
전원주택에 입주한 이듬해, 수돗가에서 이름 모를 식물이 돋아났다. 어린잎의 모양은 질경이나 과꽃을 닮았지만, 그 둘은 분명 아니었다. 이름은 다 몰라도 잡초인지 아닌지는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지만, 이 풀의 정체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식물을 그냥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해가 바뀐 다음 해에도 그 자리에 다시 돋아난 이 풀은, 이번에는 잎이 갈라져 마치 열무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꽃은 피우지 않고 키만 자라서, 또 한 해를 그대로 보냈다. 세 번째 여름, 이 식물은 어깨높이까지 자랐지만, 여전히 꽃 몽우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이름 모를 잡초라도 제 꽃은 피울 터인데…”라는 생각으로, 꼬박 3년을 기다렸다.
그 후, 약학대학입문시험(PEET) 문제 출제를 위해 16일간 집을 비웠다.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수돗가에서 뜻밖의 장면을 마주했다. 이름 모를 그 식물이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다. 길쭉한 줄기 끝에 별처럼 작은 노란 꽃들이 수없이 피어났고, 작은 꽃들은 둥글게 모여 우산 모양의 꽃송이를 이루고 있었다. 꽃송이마다 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 집 마당의 모든 벌이 여기로 모인 듯했다. 여러 꽃송이가 어우러진 모습은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을 주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자연에 금실을 수놓은 듯했다. 그 식물은 바로 마타리(Patrinia scabiosaefolia)였다.
마타리는 우리나라, 일본, 몽골, 시베리아 등 동북아시아에 자생하는 식물이다. 일본에서는 마타리를 가을의 대표적인 7가지 꽃 중 하나로 꼽으며, 서양의 정원사들은 마타리를 ‘Golden lace partrina’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정원사는 “동양에서 온 이 식물에는 야생의 왕국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정원에 꼭 가져야 할 식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마타리는 우리나라 전역에 흔하게 자라는 들풀이지만,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마타리가 우리 집 마당에서 홀연히 피어난 것이다. 3년을 기다린 끝에 마주한 마타리꽃은 반가움을 넘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마타리’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줄기가 말의 다리처럼 길다는 뜻의 ‘말다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막’(거칠다)과 ‘타리’(갈기)가 합쳐진 ‘막타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냄새가 심해 ‘맛에 탈이 난다’는 뜻의 ‘맛탈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냄새와 관련된 설이 가장 흥미로웠다.
유럽에서 쥐오줌풀(valerian)은 기원전 5세기부터 진정, 경련 해소, 불안 완화 등에 사용되어 왔다. 독일에서는 현재도 쥐오줌풀 뿌리 추출물이 수면제나 진정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서양에서는 마타리가 쥐오줌풀과 꽃 모양이 비슷하고, 둘 다 뿌리에서 독특한 냄새가 나며, 진정 작용이 있어서인지 ‘Eastern valerian’, ‘Golden valerian’, ‘Yellow-flowered valerian’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쥐오줌풀이 자라고 있으니, 쥐오줌풀이 이름에 들어가는 것은 조금 혼동을 줄 수 있겠다. 쥐오줌풀과 마타리는 모두 마타리과(Valerianaceae)에 속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식물의 냄새 성분은 유사할까? 그리고 이러한 성분들이 실제로 진정 작용에 기여할까? 궁금증이 생겼다.
마타리의 뿌리는 썩은 된장을 연상시키는 냄새가 나며, 한방에서는 ‘패장근(敗醬根)’이라 불린다. 실제로 일부 모종을 옮길 때 그러한 냄새가 느껴지기도 했다. 이처럼 강한 냄새는 주로 이소발레르산(isovaleric acid)과 아세트산(acetic acid)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다. 흥미롭게도, 쥐오줌풀 역시 이 두 가지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또 흥미로운 점은, 불쾌한 발냄새를 연상시키는 이소발레르산과 달리, 그 에스터 형태는 오히려 기분 좋은 향을 내며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용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에틸 이소발레레이트(ethyl isovalerate)는 사과향이 나 향수나 화장품에 사용되기도 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소발레르산은 GABA 수용체를 활성화시키지 않거나, 그 작용이 매우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쥐오줌풀에서 진정 작용을 유발하는 주요 성분은 이소발레르산이 아니라, 이소발레르아미드(isovaleramide) 또는 세스퀴테르펜(sesquiterpene) 계열 화합물인 발레레놀(valerenol)일 가능성이 높다. 마타리에서도 patrinene이나 isopatrinene과 같은 세스퀴테르펜 계열 화합물이 진정 작용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마타리 뿌리의 특이한 냄새는 주로 이소발레르산에 기인하지만, 진정 효과는 오히려 세스퀴테르펜 계열의 화합물들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겠다.
마당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이름 모를 잡초로 지내다가 마침내 꽃을 피운 마타리는, 내게 단지 보기 좋은 들꽃에 그치지 않았다. 특유의 냄새, 다시 말해 그 향기 성분들까지 알게 되자, 이 식물이 지닌 또 다른 얼굴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마타리는 어떤 약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렇게 독특한 냄새가 나는데, 정말 나물로도 먹을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궁금증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글. 경희대학교 약학대학 이용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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