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과 개복숭아, 씨앗의 독성과 해독 기전(下)
이용섭 교수 [칼럼]
아미그달린은 아몬드, 사과, 은행, 복숭아, 자두 등 여러 과일의 씨앗에 미량 포함된 화합물이다. 이 성분은 우리 몸속 장에서 대사되면 맹독성 물질인 시안화수소(HCN, 靑酸)가 생성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집사람에게 매실이나 개복숭아를 발효할 때에는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예전에 내가 어릴 적, 고향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청산가리(시안화칼륨(KCN)의 일본식 표현)를 묻힌 콩으로 꿩을 잡던 기억도 있기 때문이다. 청산가리는 위산과 반응하면 역시 시안화수소로 바뀌는데, 바로 이 독성 때문에 꿩이 죽는 원리였다.
과일의 씨앗에는 왜 아미그달린이라는 독성 성분이 들어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식물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아마도 인간을 포함한 초식동물일 것이다. 어떤 식물들은 종족을 퍼뜨리기 위해 달콤한 열매로 초식동물을 유혹하지만, 씨앗까지 먹혀버리면 번식이 어려워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식물의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씨앗에 독성을 담는 것이다. 아미그달린은 그런 방어 수단 중 하나다. 이 성분 자체는 식물에 해를 끼치지 않으며, 열매가 익어 씨앗 껍질이 단단해질수록 아미그달린이 외부로 쉽게 방출되지 않게 되어 있다. 하지만 초식동물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씨앗을 씹어 으깨 먹을 경우, 아미그달린이 쉽게 방출되어 장 속에서 대사되고, 그 과정에서 청산(시안화수소)이 생성되어 독성을 일으킨다.
이러한 경험이 자자손손 반복되면, 초식동물은 본능적으로 해당 식물의 여린 씨앗을 피하게 되고, 그 결과 식물은 자신의 종자를 보호하여 종족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열매의 과육은 제공하되 씨앗은 지키는, 일종의 공존을 위한 방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은행 열매를 너무 많이 먹으면 호흡곤란을 겪을 수 있다는 것도 아마 이러한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미그달린으로부터 생성된 시아나이드(CN⁻)가 세포 호흡을 담당하는 효소인 시토크롬 c 산화효소(cytochrome c oxidase)의 철(Fe) 이온에 결합하면, 세포 내 에너지 생성이 차단된다. 이로 인해 세포 호흡이 멈추고, 결국 생명 활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식물은 동물처럼 움직일 수 없기에, 뿌리를 내린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손을 보존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초식동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거나, 땅속의 제한된 영양분을 두고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해충, 심지어 다른 식물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식물들은 저마다 아미그달린, 피톤치드, 탄닌 등과 같은 이차 대사산물(second metabolites)을 만들어내고, 이를 주변에 방출함으로써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혹시라도 매실 엑기스를 담그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을까, 또는 아몬드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갑자기 먹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괜한 걱정이 들기도 한다. 사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몸에는 시아나이드를 해독하는 방어 기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과 신장에는 로다네이즈(rhodanase)라는 효소가 풍부하게 존재하는데, 이 효소는 시아나이드 이온(CN⁻)을 독성이 없는 티오시아네이트 이온(SCN⁻)으로 변환시켜 소변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일정 수준까지는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언제나 "지나침"에 있다. 소량의 시아나이드는 우리 몸의 효소인 로다네이즈가 충분히 해독할 수 있지만, 그 양이 과해지면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개복숭아 열매에는 아미그달린이 극히 소량만 들어있고, 엑기스를 한 번에 많이 섭취하는 일도 드물며, 우리 몸에는 그에 대응하는 방어 기전도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앗을 제거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익었을 때 담그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집사람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산복사나무 덕에 이제는 복사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기고 있지만, 개복숭아 엑기스를 떠올리다 보니 생각만 많아졌다. 이럴 땐 ‘Too much knowledge can be a burden’이란 말이 떠오른다. 괜한 잔소리라며 흘려듣던 집사람이, 돌이켜보면 오히려 더 지혜로웠던 건 아닐까 싶다.
글. 이용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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