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할 기억에 뇌가 갇힌다, 트라우마 치료 현장 지키는 백명재 교수
사건은 끝났지만, 뇌는 여전히 반응 중… 회복의 출발점은 ‘말할 수 있는 안전’ 기억을 지우는 게 아니라 반응을 바꾸는 일… 치료는 기다림의 예술
[팜뉴스=우정민 기자] 범죄 피해자나 극단적 사건을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경희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백명재 교수는 “트라우마는 뇌의 생리적 구조와 기능까지 바꿔놓는 사건”이라며 “사건이 끝났다고 해서 회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현재 스마트센터 총괄지원단장과 서울서부스마일센터 센터장을 겸하고 있으며, 트라우마 치료 현장에서 다년간 피해자와 직접 만나고 있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뇌의 편도체(아미그달라)가 과활성화돼, 일상 속 사소한 자극도 위협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를 조절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저하되면 그 상태가 고착화되기도 하죠.” 그는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어떤 이는 빠르게 회복하는 반면, 누군가는 오랜 기간 후유증을 겪는 차이는 그 사람의 정신건강 상태, 사회적 지지망 여부, 회복 탄력성 등 복합적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7일, 팜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백 교수는 유튜브 건강버스TV 인터뷰를 통해 트라우마가 뇌에 미치는 영향과 회복의 조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치료를 두려워 마세요… 전문가들은 당신을 압박하지 않습니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이 병원을 찾기 어려운 이유로 ‘회피’를 꼽았다. “치료자에게 처음부터 모든 사건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이 치료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치료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죠.” 그는 “전문가는 이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간단한 설명만 듣고, 신뢰 형성 후에 조금씩 사건에 접근합니다. 노출기반 치료는 효과가 입증된 방식이지만, 무리한 노출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만약 치료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달라. 더 세심하게 접근하는 다른 전문가를 만나 치료를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상처는 드러낼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됩니다
트라우마의 깊이는 외부에서 쉽게 가늠할 수 없다. 백 교수는 “사건을 겪은 당사자조차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기 어려울 수 있다”며 “그만큼 드러내는 과정은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운 분들은 감정 인식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며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 개념을 설명했다. 이 경우 감정 자체를 느끼거나 구분하는 능력에도 제한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의 역할은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반응은 바뀔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의 목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백 교수는 “기억은 뇌에 남아 있지만, 그 기억에 대한 반응은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트라우마를 겪은 뇌에서는 편도체(아미그달라)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전두엽의 조절 기능이 저하되는 현상이 관찰된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소한 자극에도 과도한 위협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치료는 이러한 반응 체계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며, 회복은 결국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트라우마 치료는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상태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 치료의 시작점은 ‘사건을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된 상태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환자가 감정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을 말하게 하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초기에는 감정 조절이나 안정화 기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고 설명했다. 치료자는 환자의 상태를 충분히 관찰하고, 그 속도와 준비도를 존중해야 하며, 말하지 않는 시간조차 치료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백 교수의 입장이다. 그는 “치료자는 환자가 언제 말할지를 예단해서는 안 되며, 말하지 않는 것을 문제로 삼아선 안 된다”며, 치료는 결국 인내와 기다림의 예술이며, 전문가의 역량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의사는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치료를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는 ‘심판받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백 교수는 “의료기관은 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치료자는 판단자가 아니라, 회복을 돕는 동반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진료실을 ‘심문’의 공간으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을 수 있다며, “의사는 감정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지, 그 기억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상처 입은 경험이 회복의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초기 치료에서 상처를 경험한 이들이 이후 치료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백 교수는 “치료가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 중에는 과거의 불쾌한 치료 경험 때문에 다시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하지만 모든 치료자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며, 나에게 맞는 전문가를 찾는 것도 회복의 일부”라고 조언했다. 실패한 경험이 회복의 가능성까지 지워버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준비가 되면, 기억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사건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치료를 통해 감정적으로 준비가 되면, 그 기억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게 된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 기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삶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 수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곧,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나 사이에 새로운 거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치료는 이 거리감을 확보하는 과정이며, 기억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지각을 바꾸는 것이다.
회복은 나만의 리듬으로 이뤄집니다
백 교수는 회복의 속도는 개인마다 다르다고 강조한다. “누군가는 몇 주 만에 감정이 정리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며 “중요한 것은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복은 경쟁이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표현했다. “서두르지 말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오늘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회복의 본질입니다.”
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가 단지 개인의 기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사건 이후에도 뇌의 특정 부위가 위협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회복을 위해서는 주변의 지지와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트라우마의 후유증과 회복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범죄 피해자의 시선에서 겪은 감정과 일상의 변화를 담은 책 ‘나는 범죄 피해자입니다’를 가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배승민 교수, 충북대학교 심리학과 유성은 교수와 함께 공동 집필했다. 책은 단순한 피해 경험의 나열이 아니라, 트라우마 이후의 심리적 재건과 사회적 회복을 위한 제도적 논의까지 포함한 실질적인 목소리의 기록이다. 사건 이후의 고통을 언어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그 말하기가 어떻게 나 자신을 이해하고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책을 펴냈다고 밝혔다.
스마일센터는 출발선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 모릅니다
백 교수는 현재 서울서부스마일센터 센터장과 스마트센터 총괄지원단장을 맡고 있다. 그는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이 병원을 찾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치료의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라며 “스마일센터는 그런 분들이 보다 부담 없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많은 이들이 스마일센터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도 그는 아쉬워했다. “스마일센터는 전국에 여러 곳이 있지만, 홍보가 잘 되지 않아 실제 피해자들이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이용자 입장에서는 언제, 어떻게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강제로 사건을 말하게 하지 않고, 본인의 속도에 맞춘 심리치료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트라우마 치료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관계’
백 교수는 “트라우마는 외상 그 자체보다 그 이후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처가 회복되는 방식은 단순한 의지나 시간이 아닌, ‘이해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안전’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기억은 반응을 바꾸고 사람은 다시 일상으로 걸어갈 수 있다.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기다림이고, 그 기다림을 설계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