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환자 자기결정권과 가족의 역할
환자의 자기결정권(자율성)은 20세기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의료영역의 핵심가치다. 과거에는 법적으로 의사의 의료행위에 따른 신체침습은 주관적 치료목적과 객관적 의술법칙(lege artis)에 부합하는 한, 치료의 성공 여부나 환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유와 인권이 강조되면서 오늘날은 의술법칙에 부합하는 의료행위도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따라 환자의 동의(Informed Consent)를 받아야 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고, 법적으로는 이를 설명의무라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응급상황이 아닌한 모든 의료행위는 의사의 충분한 설명을 통한 환자의 승낙을 전제로 하고, 환자를 의료행위의 객체가 아니라 의료행위의 상대방으로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 의사가 의료행위를 하기 전 정보제공(설명) 의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대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환자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의사가 의학적 관점에 따라 결정한 의료행위를 받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다시 말하면 환자가 원하지 않는 의료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다. 과거에 의사가 의학적 관점에 따라 스스로 의료행위를 결정하여 시행했다면,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여 추가로 의사의 의료행위 결정에 대해 추가로 환자의 동의를 요구할 뿐이다. 모든 의료행위를 환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며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의 1차 결정권은 여전히 전문가인 의사에게 있고, 의사들의 직업(양심)의 자유는 보장된다. 따라서 환자가 요구하는 의료행위가 의사의 전문지식, 직업적 양심에 반하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의료행위를 의사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며, 이러한 경우에 의사는 당해 의료행위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로 환자의 과도한 요구나 의사의 진료권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따른 의사의 보호의무에 대한 침해를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의료' 제15조에 따라 의사는 진료를 거부할 수 없고, 정당한 사유없이 거부한 경우 「의료법」 제89조에 따라 형사처벌된다. 진료거부죄에서 ‘진료거부’라는 文言의 의미는 진료의무가 있음에도 거부하는 경우에만 구성요건해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래서 진료나 조산의 요구가 없으면 애초에 진료의무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진료거부가 될 수 없으며, 환자가 진료를 거부하거나 진료 후 의사가 더 이상 의료행위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의사에게 진료의무가 없으므로 이 경우도 역시 진료거부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특히 환자가 의사로서 양심과 전문지식에 반하는 치료방법 등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진료의무가 없으므로 진료거부행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의 행정해석(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정책팀 – 5167, 2006. 12. 28. 등)처럼 일단 진료거부에는 해당하고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하는 태도는 환자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또한 가족주의 색채가 비교적 강한 우리나라에서 가족의 역할도 자기결정권에 대한 오해를 부추긴다. 의료행위에 대한 승낙능력은 의사의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침습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예견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연적 의미의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민법적 의미에서 행위능력 혹은 형법적 의미에서 책임능력이 전제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피성년후견인이나 미성년자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승낙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상황도 존재하며, 반면에 의식이 있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 승낙능력의 경계선상에 있는 상황에서 환자가 아닌 제3자에게 설명하고 그 제3자가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의료행위와 관련하여 제3자가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결정할 최종적 권리는 원칙적으로 없다. 따라서 여기서 제3자의 동의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므로, 가족 등 제3자의 결정이 의사의 직업적 양심과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반한다면 의사는 법적인 조치나 권한 있는 기관에 이의를 제기하고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 결정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의사가 가족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경우 차후에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는 있다. 반면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보듯이 가족의 결정에 따른 의사도 그 가족과 함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물론 임상에서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의사가 환자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가족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결정으로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법적 분쟁을 제기하면 피할 방법은 없다. 의사가 소극적인 결정을 하도록 만드는 사회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의사의 직업적 양심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정관청과 사법부의 환자에 대한 온정적인 태도도 변화가 필요하지만, 의사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적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 필자 약력
현) 단국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 학사 홍익대학교 / 법경대학 법학과
- 석사 홍익대학교 / 법학과 (형사법) / 형사법
- 박사 Martin-Luther-Univ. Halle-Wittenberg / 법과대학 (형법, 의료법) / 형법
- 박사 고려대학교 / 법학과 (형법) / 형법
- 주요 연구 분야 : 의료형법 (안락사, 낙태, 생명공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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