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선진국 경험 중인 '적응증별 약가산정' 한국에서도 필요할까
첫 적응증 기준 단일 약가 책정 지적 계속 실 의약품 혜택 반영한 가치로 접근 개선 필요
[팜뉴스=김민건 기자] 국내에서도 적응증별 약가산정(Indication-based Pricing, IBP)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앞서 해외 제약선진국이 먼저 도입해 사용 중인 만큼 정부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일한 약제인데 적응증에 따른 임상적 효과와 경제적 효율성을 평가해 각기 다른 약가를 산정하는 방식이 한국에도 필요할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1일 서동철 의약품정책연구소 소장(약업경제학박사)은 다국적제약사 출입 모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적응증별 약가산정은 해외 여러나라에서 실제 적응증별 임상적 효과와 경제적 효율성을 반영해 각기 다른 약가를 산정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최신 약제에도 적용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날 서 소장은 "적응증별 약가산정은 현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하고 있는 경제성평가에서 한 단계 더 세분화된 것이다"며 국내 도입 시 기대 효과와 문제점 등을 제언했다.
IBP 도입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고령화로 인해 의약품 지출비가 증가하면서다. 여기에 면역·표적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가 개발돼 의약품 약가가 매우 비싸졌다. 제약사와 정부가 인정할 만한 의약품 가치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환자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거론 중이다.
대표적으로 사보험 제도가 유명한 미국이 비용 효과적인 의약품과 치료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실질적으로는 공보험 비율이 높아서다. 미국은 65세 이상 고령 인구에 대한 건강 정책을 국가가 책임지며 입원비와 이에 따른 약제비를 지원한다. 미국 정부도 예전과 달리 상당한 약제비를 지출하고 있다.
적응증별 약가산정은 특정 약물이 한 개 이상의 적응증을 가질 때 각각 적응증 가치를 고려해 서로 다른 가격을 책정하거나 환급 시 차등 할인하는 방식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개념이다. 의약품 가치를 합리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특정 적응증에 부합하는 가격을 개별적으로 설정, 의료시스템이나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실제 치료 혜택에 상응하도록 설계한다는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약품 가치에 맞게 가격을 책정해야 한다는 '가치기반 약가산정(Value-based Pring, VBP)' 개념이 우선시 된다. 쉽게 말해 음식이나 옷을 구입할 때 원가를 계산하지 않고, 실제 제품 개발부터 제조와 유통, 판매, 소비자 수요 등을 반영한 경제적 비용을 따져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다.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어떤 질환에 처방되는 적응증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 제약사 수익이 달라지며 약의 가치가 매겨진다. 심평원에서 가치기반 약가산정을 하고 있는 것이 경제성평가다.
이제 여기서 더 나아가 IBP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 소장은 "IBP는 지금 시행 중인 경제성평가를 적응증별로 더 세분화해서 제한된 자원을 최적으로 배분, 의료비 절감 효율성과 특정 질환에서 환자 접근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도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출시된 고가 면역항암제는 멀티 인디케이션이 일반적이다. 최근 나오는 항암제들이 상당히 적응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질병마다 적응증이 상당히 다르다"며 "이렇게 적응증이 다른데 가격은 어떻게 설정할지,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의약품에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치료 혜택을 반영하는 가격인지, 그렇지 않다면 가격을 제대로 반영하는 기전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 게 적응증별 약가산정 개념이다"고 설명했다.
▷최근 출시된 면역항암제 대부분 '멀티 인디케이션'
이날 서 소장인 공개한 발표 자료를 최근 미국에서 출시한 면역항암제 60%가 멀티 인디케이션이다. 2003~2014년 미국에서 판매한 항암제 88개 중 55%, 전세계 2018년 의약품 67%가 멀티 적응증이며, 2011~2021년 미국에서 출시된 항암제 중 25%가 허가 후 적응증을 추가했다.
많은 국가에서 멀티 인디케이션 추세와 달리 출시 당시 첫 적응증이 무엇이냐에 따라 약가를 결정하고, 적응증을 추가할 때마다 약가를 인하하고 있다. 멀티 인디케이션을 약가에 반영하지 않다보니 환자 접근성을 제한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서 소장의 분석이다.
예로, 신약을 개발했을 때 첫 적응증은 사망률이 높지 않은 암종을 적응증으로 해서 약가를 받았다면 이후 미충족 수요가 높은 암종을 적응증에 추가했다고 해도 상대적 가치에 따라 약가를 높일 수 없다. 제약사의 R&D 유인 요인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높은 가치가 있는 적응증에서 고가의 단일 약가를 산정했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가진 적응증을 추가했을 때 비용 효율적이지 않게 된다. 비급여가 될 수 있어 환자 접근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A라는 의약품이 출시될 때 허가 적응증에 따라 의약품 가격을 결정하는 '단일 약가'를 적용하고 있다. 이후 새 적응증을 추가할 때는 치료 대상 환자가 늘어남에 따라 약가를 인하한다. 1개 제품이 다양한 적응증을 가진 '멀티 인디케이션(Multi-indication)'인 경우 어떤 약가와 가치가 매겨진 적응증에서 먼저 출시하는지에 따라 수익성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후속 약물이 나올 때마다 일정 약가를 깎다보니 제약업계에서는 멀티 인디케이션 약제는 각 적응증별 효능, 비용 효과성, 시장 수요가 다르기에 현재 단일 약가 제도가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
신약을 출시할 때 어떤 적응증을 먼저 확보하냐에 따라 약가가 결정되고, 적응증 확대에 따른 급여기준을 넓힐 때 영향을 미치다보니 업계에서는 "시장에서 실제 생각하는 가치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적응증별 약가산정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는 이유다.
서 소장도 "많은 나라에서 처음 의약품이 나왔을 때 가격을 기준으로 해서 적응증을 추가할 때마다 일정 가격을 무조건 인하하는 사용량-약가연동제(Price-Volume Agreement, PVA)를 많이 하고 있다"며 "실제 약가를 그렇게 정하다보면 어떤 적응증으로 먼저 신약을 출시하냐에 따라 약값을 결정하다보니 시장에 원하는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초 등재 적응증에 부여한 가격이 향후 급여 평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약사로서는 상대적 가치가 높은 고가 적응증이나 약가 인하율이 낮은 적응증을 우선으로 해서 급여 평가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며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 제약사 입장에서는 상업화 시기가 늦어질 수 밖에 없으며, 제대로 약가 결정이 안되다보니 환자가 약을 사용하기까지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어 "이러한 문제로 인해 여러 적응증을 가지고 있을 때는 현재 단일 약가 대비 치료 효과와 가치를 반영한 적응증별 약가산정으로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IBP 도입하면 제약사 R&D 집중, 환자 접근성 개선 가능
IBP를 도입함으로써 제약사는 신약 개발 불확실성을 줄여 R&D에 더 집중할 수 있으며, 비용효과적 측면에서 환자 접근성을 개선하고,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를 빨리 사용하는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해외 국가에서는 단일 약가 대비 IBP가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경우 이미 도입해 사용 중이다. 다만 고려 사항이 있다. 약가 차등으로 인한 사회적 합의다. 환자 입장에서는 동일 치료제를 사용하는데 어떤 질환이냐에 따라 본인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 소장은 "항상 새로운 제도를 하려면 보험자와 제약사가 좋은 전망만 가지고 얘기할 수 없다. 여러 사항을 고려해야 하며 의견 조율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처음부터 이 제도를 전체 의약품에 하는 것보다는 위험분담제(RSA) 항암제, 희귀질환 약제에 시범적으로 적용해서 경과를 본 뒤 전체 시스템에 반영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제약사도 모니터링 제도 등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