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

발사르탄 사태 이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사들에게 구상금 명목으로 손해배상을 요구한 가운데 제약사들이 집단소송으로 반격에 나섰다.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에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구상금 청구 거부 소송에 나선 제약사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국내 제약사 69곳에 건강보험 추가 지출손실금에 대한 구상금 20억 3000만 원을 청구했다. 발사르탄 불순물 사태 이후 의약품 회수 과정에서 보건당국이 대신 지불한 조제료와 진찰료를 제약사들로부터 돌려받겠다는 취지였다.

건보공단은 구상금 청구에 대한 법적 근거로 ‘제조물책임’을 들고 나왔다.

제조물책임법이란 제품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생명·신체의 손상 또는 재산상의 손해에 대하여 제조한 자에게 무과실책임의 손해배상 의무를 지우고 있는 법률이다. 제약사들이 생산한 발사르탄계 의약품에서 NDMA가 검출됐기 때문에 제약사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 건보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69개 제약사 중 26개 제약사에서 4억 3600만 원의 구상금을 납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일부 제약사는 실제로 구상금을 납부했다. 익명을 요구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사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업 가치 중 하나는 제조약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다”며 “제약사가 의약품 관련 소송에 연루되면 안정성 측면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생길 것을 우려해 구상금을 낸 업체도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제약사들은 소송으로 ‘맞불’을 놓았다. 구상금 청구 대상에 포함된 제약사 중 36곳은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건보공단을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오히려 건보공단을 향해 반격을 가한 것이다.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이란 자신에게 변제할 채무가 없는 경우에 이를 법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소송이다. 발사르탄 의약품에 발생한 발암물질에 대한 제조물책임법상의 손해배상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약사들이 부담을 안고 정부 기관을 상대로 전례 없는 소송까지 불사한 ‘속내’는 뭘까.

앞서의 제약업계 관계자는 “아무래도 정부 상대로 진행하는 소송이다 보니 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다”면서도 “그러나 발사르탄 사태 당시, NDMA에 대한 규격 기준도 없었고 보건당국과 제약사 모두가 위험성을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약사들은 검출을 ‘못한 것’이지 ‘안한 것’이 아니며 정부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전했다.

제약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데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기업들이 강력한 법적 근거로 제시한 것은 제조물책임법에 있는 ‘면책조항’이다. 관련법 4조에 따르면 '제조업자가 해당 제조물을 공급한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결함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경우에는 제조물책임법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하는 것으로 돼 있다.

발암물질 NDMA에 대한 검출 기준도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사르탄에 NDMA 검출 사실을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검증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제약사들의 입장이다. 때문에 제조물 책임법상 ‘면책조항’이 적용돼 구상권 청구를 거부할 법적인 명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약사는 ‘완제품제조사’일 뿐이라는 항변이다. 제약사 입장에선 원료제조사로부터 원료를 공급받아 완제품만 생산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다른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사에서 사용하는 원료들의 출처는 원료의약품 제조사가 만든 것이다”며 “원료제조사 역시 정부 승인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승인을 받아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사용한 원료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원료공급업체의 책임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발사르탄 사태의 특수성도 제약사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또 하나의 ‘숨은 배경’이다. 또 다른 제약업계 관계자는 “사실 구상금 액수는 제약사들이 입은 손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며 “다만 여태까지 선례가 없었던 일이라 이번 사태가 향후 유사한 사태의 기준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제약사가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정부가 건보재정 확충이나 다른 손실을 메우기 위해 라니티딘이나 니자티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어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발사르탄과 같은 대규모 사태가 여태까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향후 보건당국 방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전언이다. 실제로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구상금 청구 ‘선례’가 없었던 만큼 이번 소송 결과가 유사 사례들의 ‘스탠다드(표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조민지 변호사는 “발사르탄 회수 및 판매 중지 처분을 일으킨 NDMA 가이드라인은 시판 허가 후 생긴 것”이라고 말하며 “제조업체들로선 발사르탄 제재가 판매·유통되기 전에 미리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제조물책임법의 면책조항이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고 밝혔다.

구상권 청구의 법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구상금 청구를 위해서는 발사르탄에 의한 손해가 발생해야 하는데 ‘법적인 의미의 손해’는 없다는 의견이다.

조 변호사는 “건보공단이 발사르탄을 사용해서 암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거나 그로 인한 위자료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며 “발사르탄 대신 다른 제재로 만들어진 약품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을 제약사들에게 부담하라는 취지의 구상금 청구다”고 설명했다. 즉 이는 발사르탄 그 자체로 인해 발생한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 조 변호사의 의견이다.

발사르탄의 위험성이 사후에 발견돼 회수 조치가 뒤늦게 이뤄지는 과정에서 손해가 생긴 것인데, 이 손해는 제약사들의 제품 생산 행위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보건당국은 말을 아끼고 있는 모양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복지부에서 건보공단 산하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 발사르탄 문제를 부의해서 구상금 청구가 이뤄진 것은 맞다”면서도 “건보공단으로부터 소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전달받지 못한 상황이다”고 선을 그었다.

구상금 청구의 주체인 건보공단 측은 “제약사들이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 부서에서 절차대로 진행 중이다”고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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