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를 시작으로 공급자단체들이 수가협상 1라운드에 돌입한 가운데 올해도 역시 깜깜이식 협상 툴을 벗어나기는 어려워보인다. ‘벤딩(추가재정소요분)’을 둘러싼 공급자들의 수가협상개선 요구가 올해도 수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벤딩폭’은 수가협상의 핵심이다. 그동안 건강보험공단이 확보한 벤딩폭의 규모에 따라 공급자단체들의 희비가 엇갈린다는 이유에서다.

공단은 해마다 환산지수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건강보험 가입자 등으로 구성된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와 논의를 거쳐 벤딩폭을 정해왔다.

문제는 벤딩폭의 공개시점이다. 공급자단체들은 밴딩폭을 알지 못한 채 ‘깜깜이’ 수가협상을 치렀다. 협상 막바지에서야 재정운영 소위가 최종 벤딩폭을 결정하면 공급자단체들은 혼란에 빠졌다.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도 협상 전략을 다시 짜야하는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이에 공급자단체들은 매년 벤딩폭의 조기 공개를 공단과 재정운영 소위에 요구해왔다. 하지만 공단은 난색을 표하면서 가입자와 공급자단체들의 관계는 초기부터 틀어졌다.

수가협상의 당사자들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고 막판에는 ‘결렬’이란 결과로 얼룩져왔다.

그렇다면 올해는 다를까. 공단은 올해 초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에게 벤딩폭의 조기 공개를 요청하겠다고 밝혀 공급자단체들의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난 15일 공단과 1차 협상을 치른 의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공단에게 벤딩폭을 공개하라고 전했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것.

 

사진 설명=지난 15일 공단과 공급자 단체가 1차 협상을 벌이고 있다.
사진 설명=지난 15일 열린 1차 수가협상 자리에서 공단과 공급자단체가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필수 의협 수가협상단장은 협상 직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벤딩폭을 미리 정하면 당연히 불공정한 협상이다”며 “벤딩폭을 공개해야 공정하다. 적어도 상한과 하한 정도는 알고 나서 접근해야 한다”며 벤딩폭 공개에 대한 기대를 내보였지만 이내 통곡의 벽임을 느낀 것이다.

의협 뿐만 아니라 공급자단체들은 벤딩폭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적정한 수가를 위한 인상폭을 제시하기도 어려워진다. 이에 일단 높은 수치를 불러 눈치전을 벌이게 되고, 협상 종료시점인 자정이 다되어서야 서서히 드러나는 벤딩에 허탈함을 느끼고 결렬 또는 낮은 인상폭을 가지게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한 공급자단체 관계자는 “처음에는 높은 수치를 일단 제시해보지만, 전체 파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무작정 높이 부르지도 못한다. 협상 마지막날 밤 10시에 협상에 들어가도 밴딩폭이 정해지지 않으면 도장을 못 찍는 경우도 다반사다. 협상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답답할 노릇”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공단은 여전히 벤딩폭 공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공단 관계자는 “벤딩폭 공개는 어렵다”며 “협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우려가 있다. 재정 규모를 먼저 공개하면 협상이 공급자단체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당초 투명한 협상, 조기 타결 협상을 약속하며 공급자와의 발전협의체도 꾸렸다던 공단이지만 이렇다 할 협상의 변화가 보이지 않자 공급자 사이에서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나오는 모양새다. ‘건보공단의 역할 무용론’까지 등장한 것. 재정운영 소위가 막판에 벤딩폭을 공단에 통보하기 전까지 공단이 실질적으로 수가 협상에 대한 권한이 없다는 지적이다.

공급자단체 관계자는 “공단에 협상 권한이 있는지가 의문이다”며 “공단은 매번 ‘재정운영위에서 결정이 나야 한다’는 말만 반복한다. 벤딩폭도 다르지 않다. 정작 벤딩폭은 재정 소위에서 결정한다. 실질적인 권한이 재정 소위에 있는데 우리가 공단하고 협상할 이유가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수가 협상에선 가입자, 공급자, 정부들이 서로 합의를 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가입자들이 이미 벤딩폭을 정해놓고 공급자들은 ‘이것만 받아라’고 하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다. 심지어 문제를 제기하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페널티까지 받는다”고 덧붙였다.

공단은 ‘역할 무용론’에 대해 적극 반박했다. 공단 관계자는 “공단 산하에 재정운영위가 있다”며 “공단은 보험료를 내는 가입자의 편에서 일을 해야 한다. 가입자를 대표해서 협상을 하는 것이지 재정위와 공단을 따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다른 공단 관계자 역시 “공단의 협상력만 보면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며 “공단은 국민을 대리해서 보험자 역할 수행하는 기관이다. 국민을 대표한 재정운영위에서 결정한 내용을 공단이 공급자단체와 협상하는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벤딩폭 공개에 대한 공단과 공급자단체들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왔다. 첨예한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이상 올해 수가협상에서도 불필요한 소모전과 눈치싸움이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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