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얼마 전 읽은 소설가 윤대녕 선생님의 에세이에는 지금 살고 있는 ‘정릉’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담뿍 담겨 있었다. 조선시대 때부터 서울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에 더위를 피해 찾았다는 물 맑은 청수계곡과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부지런히 드나드는 북한산 자락의 멋진 풍광,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는 혹은 거주했던 작가들의 이름까지 나열을 하며 한 번 발을 담그면 빠져 나올 수 없는 정릉의 매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작가의 마음을 가장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정릉 재래시장이었다. 아직도 1980년대 재래시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정릉시장에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장사를 하고 있는 오래된 떡집, 과일가게, 야채가게, 정육점, 철물점등이 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정릉시장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건 작가의 묘사능력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기 전까지 내가 살았던 동네가 정릉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묘사했듯 정릉 재래시장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차가 다니기 비좁은 골목인 탓에 시장에 온 사람들은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의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장을 보며 흥정을 한다. 아직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유다. 최근에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곳을 더 정겹게 만드는 곳이 하나 추가됐다. 누구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식당, 문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문간은 정릉시장의 초입에 있는 상가 건물 2층에 있다. 글라렛 수도회의 사제인 이문수 신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단돈 3천원에 김치찌개와 밥을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19년째 사제의 길을 걷던 신부님이 식당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2015년에 수녀님으로부터 전해들은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고시원에 살면서 돈이 없어 굶어 죽었다는 청년의 이야기와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여전히 밥을 굶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청년들이 싼 값에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간이라는 식당 이름에 청년식당이 들어가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청년들만 와서 식사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내가 방문했던 날에도 식당 안에는 학생들 뿐 아니라, 동네 주민과 어르신들이 오셔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청년식당 문간이 원래부터 정릉에 개업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고시원이 많이 밀집돼있는 노량진이나 신림동쪽을 염두에 두고 자리를 알아보던 신부님이 우연히 수녀회에서 개업한 카페 엘브로떼가 있는 정릉을 오셨다가 마주 보이는 건물이 마음에 쏙 들어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넓은 창이 있고 2층 바로 위의 옥상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 식사 이외에도 청년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곳은 운이 좋게도 이틀 전에 세입자가 나가 마침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이튿날 바로 수도회 신부님들을 모시고 와 수도회의 허락을 받고 계약을 한 후에 다소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작년 12월에 식당문을 열게 됐다. 요리는 신부님이 하지 않고 전문 요리사가 한다. 열심히 배우고 있지만 아직 잘 늘지 않는 요리 실력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은 전문 요리사가 만들고 신부님은 홀 서빙을맡고 있다. 홀서빙은 신부님 이외에도 자원봉사자 두 서너 분이 도와주신다고 한다. 문간의 메뉴는 단 한 가지, 김치찌개다. 여기에 반찬으로 양배추 샐러드가 곁들여 나오는데 간혹 야채나 계란, 고기 등을 기부해 주시는 분이 있으면 반찬이 추가되기도 한단다. 개업 이후에 몇 달 간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최근 들어 조금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신부님은 아직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계란후라이 하나를 얹어주지 못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

 

문간 옆에는 곳간이라는 북카페가 있다. 문간에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한 곳으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카페지만 커피를 팔지는 않으므로 테이크 아웃한 음료를 가지고 와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곳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은 바로 2층 위에 있는 옥상이 아닌가 싶다. 이곳 역시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는 곳이다. 그늘막이 쳐져 있는 곳 아래에 놓여진 의자는 여러 곳에서 기부 받아 모양은 제 각각에 세련미는 덜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망은 서울 어떤 곳의 루프탑 바보다 멋졌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과 청수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흐르는 정릉천, 그리고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과 부산함이 친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얼마 전, 문간의 창업정신에 감명을 받아 제 2의 문간을 만들어도 되냐는 제의를 받으셨다는 신부님은 좋은 뜻을 가진 분이 만든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으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청년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는 문간이 더 많이 생기길 바란다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하기에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신다.

문간에서 식사를 한 후에 마주 보이는 곳에 있는 카페 엘브로떼를 찾았다. 스페인어로 ‘새싹’을 뜻하는 엘브로떼는 청소년 학생들의 진로와 자립을 돕는 작업장형 카페이며 커피를 비롯해 직접 덖은 꽃차와 과일청, 수제 초콜릿, 쿠키등을 판매하는 곳이다. 내가 간 날은 자원봉사자분이 일을 하고 계셨지만 특정한 요일에는 학생들이 나와 근무를 하며 사회경험을 쌓기도 한단다.

문간과 엘브로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곳은 많은 면에서 닮아 보인다. 사회로 나가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는 학생과 청년을 담담히 바라보며 기회를 주는 곳. 그리고 그 일은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자원 봉사자들과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이뤄낼 수 있다는 것. 조만간 다시 한 번 문간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양 손에 계란 두 판을 거머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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