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leeheekyoung@hotmail.com)

덕수궁이 주는 역사적 의미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어느 날 이메일로 날아든 “신여성 도착하다”의 전시회 포스터 속 여인의 모습이 요즘 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과 사뭇 닮아있다.

짧은 단발, 홍조를 띤 하얀 피부, 짙은 눈썹에 다홍빛 붉은 입술. 차이점이라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100여년의 시간뿐. 세련된 외양만큼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크러쉬의 원조 “신여성”들이 돌아왔다.

“신여성 도착하다”의 전시를 보기 위해 향한 곳은 덕수궁. 조선의 26대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부터 1907년 승하할 때까지 머물렀던 이 곳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세적 혼란기를 보여주듯, 전통 양식의 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함께 공존한다.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과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중화전’, ‘석어당’ 등의 전통적인 전각과 달리 고종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이하던 정관헌이나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기법이 돋보이는 서구적인 건물들이다.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는 석조전의 옆에 세워진 건물로 1938년에 이왕가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진 곳이다. 광복이 된 이후에도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현대미술작품이 과천관으

로 옮겨지면서 근대미술을 주로 전시하는 분관으로 1998년에 재개관 됐다.

100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2018년에 시작한 타임머신은 전시가 시작되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갈 때마다 5년, 10년을 거슬러 금새 1920년대로 이동했다.

과연 신여성이란

영어로 ‘New Woman’이라 불리는 신여성은 19세기말 미국과 유럽에서 먼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라마다 신여성에 대한 개념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초중등교육을 받고 여성 인권과 자유연애를 주창하던 여성들을 주로 일컬으며 1910년대에 등장했다.

교육의 기회가 적고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 있던 ‘구여성’과 달리 신식 교육을 받고 신문명의 혜택을 받은 ‘신여성’은 사회적 선망의 대상이자 한 편으로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20년에 그려진 나혜석의 삽화를 보면 당시에 신여성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그대로 나타난다.

신식양장에 바이올린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을 바라보며 ‘저것이 무엇인고, 아따 그 계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라며 조롱 섞인 눈길을 던지는 어른들과 달리 ‘그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 들었다면…’ 이라며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청년의 모습에서 모순적인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삽화를 그린 나혜석은 대표적인 신여성 중의 한 명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여성 최초로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이자 작가로도 활동했던 그녀는 자의식이 반영된 여러 편의 글쓰기를 통해 그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부조리한 사회상을 꼬집기도 했다.

1918년에 발표된 단편소설 ‘경희’에서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경희’를 내세워 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고 이혼 후에는 “이혼고백장”이라는 글을 잡지에 게재해 조선 사회가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조관념을 비꼬았다.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내용은 당시의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격한 파장을 일으켰으며 결국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배척돼 말년에는 행려병자로 고생을 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전시물 중에는 그녀의 자화상도 있는데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짙은 배경색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하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28년으로 그녀가 외교관이던 남편을 따라 파리에 머물던 시절. 좋아하는 그림 공부를 하며 비교적 행복했던 시기에 그녀가 왜 이런 우울한 자화상을 그렸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자화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인생전반에 걸쳐 고민했을 자의식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나혜석이 일으킨 파장 때문인지 몰라도 점차 자유연애를 꿈꾸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바라는 여성이 늘어났다. 이런 분위기는 1920-30년대에 발전한 대중매체를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 당시 발간된 잡지의 표지인물을 보면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초창기에 발간된 ‘부인’이라는 잡지에서 한복을 입고 순종적인 가녀린 여성은 이후에 발간된 ‘신여성’ ‘여성시대’라는 잡지에서 빨간색 수영복과 수영모를 쓰고 짧은 단발에 양장을 입은 세련된 도회지 여성으로 변모한다.

이들은 당시 도시문화를 즐기며 새로운 스타일로 정체성을 드러내던 ‘모던뽀이’와 함께 ‘모던걸’로 불리기도 했다. 자유연애를 바라는 대중들의 관심은 대량으로 출간됐던 딱지본 연애소설에도 드러나 있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딱지처럼 표지가 울긋불긋 다채롭다고 붙여진 딱지본 연애소설은 국문으로 쓰여 졌고 주로 통속적인 신파조를 띠고 있어 대중들에게 쉽게 읽혔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장한몽’ 역시 딱지본 연애소설의 한 종류이다.

신여성 등장으로 여성 직업도 변화

신여성의 등장은 여성의 직업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교육을 받는 여성들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사무직이나 전문직, 혹은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1944년에 그려진 이유태의 작품 ‘A pair of Modern Women’에는 한복 위에 하얀 색 가운을 걸친 전문직 여성이 실험실에 앉아 있는 모습과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배경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신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여성의 취미생활 또한 다양해 져서 독서나 음악감상, 미술, 산책 등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신여성들이 만드는 신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문화를 향유하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대중문화도 발전했다. 전시장에는 당시의 유행가요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마련돼 있다. 헤드폰을 쓰자 마치 꽁트 속 한 장면 같은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일어와 영어를 뒤섞어 가며 연애 밀당을 나누는 모던걸과 모던뽀이의 간드러진 음색이 독특한 이 노래는 1938년에 만들어진 ‘전화일기’. 노랫말에 나오는 단어와 영어발음은 다소 촌스럽지만 여자의 마음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성의 애닲은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5명의 신여성 화가 작품과 만나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마지막 공간에는 5인의 신여성-화가 나혜석,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이난영, 문학가 김명순, 여성 운동가 주세죽을 오마쥬한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1세대로 활동하면서 높은 사회적 장벽을 뚫고 2세대, 3세대에게 길을 내어 준 그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과연 얼마나 완성되었을까. 소설, 시, 수필 등 문학의 전 장르에 걸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지만 서녀라는 이력과 연애 등의 개인사로 인한 세간의 편견으로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김명순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남아 현재를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김명순의 작품 앞에서 상상해 본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나와 달리, 만약 그녀들이 오늘날로 온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경희’가 바랬던 세상은 과연 이루어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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