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1제단화

프랑스의 문학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가 쓴 단편 소설 '별'(1885)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프로방스 지방 어느 목동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예전에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이와 함께 도데의 또 다른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1873) 역시 국어 교과서에 실렸는데, 이 작품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인 알자스로렌(Alsace Lorraine) 지방을 그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전쟁의 결과로 인해서 그 지역이 독일로 귀속되어 내일부터는 독일어 수업만을 해야 하는 까닭에, 오늘을 마지막으로 프랑스어 수업을 종료해야만 하는 교사의 비애를 잘 묘사한다. 이 내용은 과거 일본의 통치에 의한 식민지 시절의 우리 아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되었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가 콜마르(Colmar)인데, 여기서 약 32킬로미터 정도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젠하임(Isenheim)에는 예전에 성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이 있었다. 이는 중세 시대에 소외된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소명으로 여겼던 수도사들이 설립한 자선 병원이었다. 1515년을 전후로 그곳에서, 당대의 유명한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 1470경-1528)가 초대받아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화를 그렸으니, 그것은 바로 수도원 병원의 성당 중앙 제단에 설치한 목판 유채화였다. 이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및 부활 등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16세기 초의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지금은 콜마르의 운터린덴(Unterlinden)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수많은 관람객들이 그곳을 찾아왔다.

여러 전염병들이 횡행하던 중세 후기 시대에, 이젠하임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은 주로 피부병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맥각병 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맥각병은 곡물에서 발생한 균이 빵을 오염시켜 이를 먹은 사람들에게서 발생한다. 이는 환자의 피부를 끔찍하게 먼저 손상시키고, 결국 그 상처가 곪아 안으로 파고들면서 신경과 혈관을 상하게 하여 고열과 경련 및 환각 등의 고통을 겪게 하다가, 심한 경우에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예수님 확대 사진
예수님 확대 사진

여러 겹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이젠하임 제단화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이다. 그뤼네발트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그 온몸의 피부에 맥각병으로 인한 상처들을 생생하게 그려 넣었다. 당시로 보면 15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바로 당대의 시점에서 당대의 시각으로 해석해 그려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교회적, 신학적 분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에 주된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십자가 수난과 죽음보다는 부활의 승리와 영광을 더 강조하였기에, 이처럼 사실주의적인 고통과 죽음의 묘사는 그뤼네발트에게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그림에서는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 표정과 손발의 경련, 그리고 온몸의 많은 상처들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에서 많은 맥각병 환자들이 고통 받다가 절망 속에 죽어갔는데, 그들이 보았던 마지막 그림이 바로 이 제단화였던 것이다. 그뤼네발트의 영혼이 담겼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그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맥각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똑같이 함께 느끼며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 환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진정성 있는 깊은 공감을 통해서만 위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단화 중앙의 이 그림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맥각병으로 인해 상처 받아 몹시 쇠약하고 앙상해진 자로 묘사함으로써, 구약 성경 이사야 예언서 53장에 나오는 예언적 말씀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즉,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3절)로서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던”(4절) 분인 것이다.

이처럼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중앙 그림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고통을 십자가 상 예수님의 고통 안에 투영시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서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베드로1서 2,24)라는 성경 말씀을 또한 떠올리게 된다. 20세기의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은 이를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치유의 메시지는 종교와 시간을 초월해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는 공감과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1년도 더 넘게 COVID-19로 인한 어두운 시간이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이 시련의 시간 속에서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작품을 다시 보면서, 이 그림이 그려진 지 500년이 지난 지금 인류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다시금 끌어안고 상처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분의 신비에 관해 묵상하게 된다. 동시에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하던 작년 3월 27일, 비 내리는 저녁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의 제단에서 위기 앞의 인류를 위해 홀로 기도하며 “인류를 구하소서!”라고 부르짖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인해 많은 이가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그림은 우리에게 시대와 종교를 초월해 감동적인 위로와 아름다운 희망의 메시지를 여전히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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