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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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는 16대 국회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됐지만, 통과는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다. 이번 국회에서도 여야 모두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명시한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는커녕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최근 안전상비의약품에 대한 점자 표기를 의무화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현재 200여 명이 동의를 표시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재 의약품들의 점자 표기 상황은 어떨까. 현실은 참담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현재 판매 중인 의약품 중 점자를 표기한 의약품은 17개사 94개 제품이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전문의약품인 데다, 일반의약품 중 안전상비의약품은 4개에 그쳤다. 게다가 점자 표기법은 ‘중구난방’이었고, 심지어 점자 표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의약품도 있었다.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골자로 한 약사법 개정안은 이번 21대 국회에서 총 2차례 발의됐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7월,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9월 각각 대표 발의했다. 두 의원 모두 장애인 국회의원으로, 장애인의 불편함에 대한 공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코로나19 등 현안 보건 이슈에 밀려 본 회의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에 분노한 경희대 학생들이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안전상비의약품이라도 점자 표기를 의무화해달라고 요청했지만, 18일 오후 7시 30분 현재 248명만이 동의한 상황이다. 장애인에 대한 시민들의 무관심이 계절만큼 차가운 것.

점자 표기 의무화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의약품 점자 표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한 상황에 놓였다. 식약처 의약품관리과가 지난해 6월 최혜영 의원실에 제출한 ‘점자표기 병기 의약품 목록’에 따르면 점자를 표기한 의약품은 17개 회사 94개 제품에 그쳤다. 이는 당시 전체 의약품인 4751개 중 약 1.98%에 그치는 수준이다. 의약품 50개 중 1개 수준이라는 것.

하지만 여기에는 숨은 1인치가 있었다. 그나마 점자를 표기한 의약품도 상당수는 전문의약품인데다, 제품명 또는 약품의 종류만 표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던 것.

앞서 식약처 자료에 따르면 94개 제품 중 전문의약품은 26개로 전체의 27.6%에 해당했다. 전문의약품의 경우 의사 처방이 필수적인 의약품으로, 일반적으로 패키지 판매보다는 약사 조제로 판매되는 경우가 많다. 안약 등을 제외하면 점자를 통해 약을 찾을 일이 드물다는 뜻.

서울 노원구의 한 약사는 “일반적으로 전문의약품은 약사 조제로 따로 소분 포장해 처방한다. 시각장애인들이 겉 포장의 점자를 확인할 일이 거의 없다”며 “안약 등은 보통 겉 포장째로 드리지만, 일반적으로 겉 포장 상자에만 점자가 표기돼 있고 정작 용기에는 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매번 안약 사용 후 겉 포장 상자에 다시 안약을 넣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약품명을 표기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제품명을 표기하는 의약품도 있었고, 단순 용도만을 표기하는 의약품도 있었다.

예를 들어 대웅제약의 경우, 점자 표기를 병행 중인 12개 의약품 모두 ‘제품명’을 상자에 표기한다. 대웅제약에서 점자 표기를 병기해 판매 중인 소화제 ‘베아제’와 ‘닥터베아제’는 모두 한글 점자로 제품명을 표기하고 있다.

반면 광동제약이 유일하게 점자 표기해 판매하는 피임약 ‘센스리베’의 경우, 점자로는 약의 효능인 ‘사전피임약’으로만 적혀있다.

사진1. 광동제약 센스리베. 사전피임약으로 점자 표기돼 있다. (출처=다음 블로그 건강 이야기)

제품명을 표기한 경우에는 제품명을 알고 있다면 쉽게 약을 먹을 수 있지만, 제품명을 잘 모르거나 잊어버리게 되면 일일이 어떤 제품인지 검색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 효능만을 적어두게 되면 약을 복용할 때는 편리할 수도 있지만, 진통제처럼 성분에 따라 효과가 조금씩 다른 약들의 경우 분류가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은 그나마 어떤 약품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표기한 축에 속한다. 약품명을 영어 점자로 적어두거나, 식약처조사와 다르게 표기한 예도 있었다.

한국애보트가 판매 중인 전문의약품 ‘콜립정’의 경우 2종류가 판매되고 있는데, 성분은 같지만 각각 용량이 145/20mg과 145/40mg으로 다르다. 이 제품들의 경우 용량은 정확하게 ‘145/20mg’와 ‘145/40mg’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제품명의 경우 ‘kcholib’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콜립정의 영문명은 ‘Cholib’이다. 영어 점자를 모를 경우 쉽게 읽기 어려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식약처 조사와 달리 점자 표기가 이뤄지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사는 “우리 약국에서 판매 중인 동화약품의 ‘판콜에스내복액’에서는 점자 표기를 찾을 수 없었다”면서 “언제부터 점자 표기를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리 측면에서 아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해당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동화약품 측에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진2. 동화약품 판콜에스내복액. 겉포장 박스에서 점자 표기를 찾아볼 수 없다. (제공=서울 영등포구 약사)

일선 약사들은 법 제정이 어렵다면 우선 제약업계에서 의약품 점자 표기법을 일원화하고, 더 많은 점자 표기 제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앞서의 노원구 약사는 “유럽의 경우 점자표기를 의무화하면서 제품명 및 용량 표기를 반드시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미국의 경우 법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 가이드라인은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도 법제화가 어렵다면 업계에서 점자 표기에 관한 가이드라인이라도 만들어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현재 점자 표기된 의약품 중 전문의약품들을 제외하면, 시각장애인들이 실제로 점자를 통해 찾을 수 있는 약의 개수는 더욱 줄어든다”며 “특히 안전상비의약품의 경우 4개밖에 되지 않는 데다 그나마도 모두 소화제밖에 없다. 시각장애인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하려면, 더 많은 종류를 확보하는 것 또한 매우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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