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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케어 영성] 죽음 앞의 회한, 그리고 평화의 선물
[헬스케어 영성] 죽음 앞의 회한, 그리고 평화의 선물
  • 신용섭 기자
  • 승인 2021.01.1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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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건강과 영성 10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 게티이미지

프랑스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 Coco Chanel, 1883-1971)이 남긴 명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은 아마도 죽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동반자이다(Guilt is perhaps the most painful companion of death)”라는 말이다.

미국 남플로리다대학교 의과대학의 종양학 교수 로도비코 발두치(Lodovico Balducci)는 그동안 수천 명의 암 환자들을 돌본 결과, 암환자의 가장 큰 고통은 ‘죄의식’이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죄의식 혹은 죄책감은 인간의 자기 화해와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시련이자 걸림돌이 된다. 코코 샤넬의 경우 역시, 그 남긴 말로 미루어볼 때,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회한과 죄의식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죽음 직전의 자책감과 죄의식에 관해서는 인간의 영적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성장’인데, 인간은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도 성장해나가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영적 성장의 중요성을 이론적이고 학문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들이 있다.

제임스 파울러(James W. Fowler, 1940-2015)는 자신이 제시한 종교적 신앙의 발달 단계들(0-6단계) 중 제5단계인 ‘결합적 신앙’(conjunctive faith)과 마지막 제6단계인 ‘보편화하는 신앙’(universalizing faith)이란 개념을 통해서, 온전함에 이르는 영적 성장의 과정과 그 중요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여기서 영적 성장의 제5단계인 ‘결합적 신앙’이란 자신과 타인 및 세상의 실재에 대한 인식을 자아와 결합시키는 단계를 가리킨다.

이는 역설적이고 심지어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가운데에서도 조화와 통합을 시도하고, 타인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6단계인 ‘보편화시키는 신앙’이란 아주 드문 경우로서, 제5단계에서 아직 남아 있는 역설과 모순의 요소들을 모두 극복하고서 진리에 대한 포괄적 전망을 통해 마침내 온전한 통합에 이르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는 진리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도덕적 차원에서 온전히 실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제임스 파울러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 1902-1994)은 자신이 제시한 인간 발달의 8단계 중 마지막 성숙 단계를 “자아통합성 대 절망”(ego integrity vs. despair)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즉,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화해를 통한 자아통합성이 결여될 때, 이는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및 절망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처럼 어려운 통합의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고통의 체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삶의 시간 동안 꾸준히 자아통합을 미리 준비해온 사람들은 그 두려움과 절망을 넘어서는 평화와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모순적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불평과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채 절망 속에서 삶을 마감할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화해와 통합 속에서 치유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동시에, 그러한 ‘평화의 선물’을 주십사 하는 기도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의 진정한 치유와 온전함이란, 자신이 지닌 과거의 상처와 회한, 현 상태의 고통,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그 모든 것을 인격적 차원에서 ‘대면’하고 ‘수용’하여,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1982년부터 임종 때까지 미국 가톨릭교회의 시카고대교구장 직을 역임했던 조셉 버나딘(Joseph Bernardine, 1928-1996) 추기경은 1993년의 어느 날, 엄청난 인생의 격랑과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 신학교를 다니다 그만두었던 한 남성이 버나딘 추기경을 상대로 성추행과 관련한 고발을 해옴으로써 미국 사회가 떠들썩하게 되었다. 버나딘 추기경은 존경받는 성직자로서 한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시련의 시간이 지나가고 결국에는 그 고발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 버나딘 추기경은 자신을 허위 고발한 사람을 탓하지 않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화해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버나딘 추기경은 1995년 췌장암 선고를 받고 수술과 투병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1996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투병 기간 동안 버나딘 추기경이 저술한 마지막 책 제목은 바로 평화의 선물(The Gift of Peace)이었다.

자신이 처했던, 말도 안 되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버나딘 추기경은 용서와 화해를 이루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평화의 선물’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담긴, 버나딘 추기경의 마지막 메시지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남기고 싶은 것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로서, 여러분도 그 안에서 제가 찾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평화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다면, 가장 힘들 때에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자유를 찾을 수 있으며, 비본질적인 것은 포기하고 본질적인 것을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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