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범 대표(한국페링제약)

사진. 최용범 한국페링제약 대표
사진. 최용범 한국페링제약 대표

의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평균 수명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 2020’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수명은 82.7년으로 OECD 평균(80.7년)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백세 인생’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업의 수명은 점차 줄어드는 모양새다. 세계적인 컨설팅사(社) 맥킨지에 따르면 1935년 당시 기업의 평균수명은 90년이었으나 1975년 30년, 1995년 22년, 2015년 15년으로 점차 줄어들었고, 세계 500대 기업도 40~50년 정도의 평균수명을 기록하는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과학자의 뚝심으로 시작해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은 기업이 있다. 소아와 산모 그리고 생명에 대한 신념을 가장 우선으로 두는 페링제약에 대한 이야기다. 팜뉴스는 잠실에서 최용범 한국페링제약 대표를 만나 페링의 철학과 비전을 들어보는 자리를 가졌다.

≫ 설립 70주년을 맞은 페링 그룹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페링(Ferring)은 1950년대에 스웨덴의 의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레데릭 폴센(Frederik Paulsen)과 에바 폴센(Eva Paulsen)으로부터 시작된 회사다. 초기에는 소아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신피질 호르몬 제제와 같은 단백질 호르몬 합성 의약품을 주로 다뤘다.

소아과 중심의 의약품을 중점적으로 개발하다 보니, 이와 밀접한 산모 쪽 질병에도 관심이 생겼고 더 나아가 출산과 관련된 영역까지도 진출하게 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호르몬 제제를 연구‧개발하면서 성장을 해왔다.

이뿐만 아니라 궤양성 대장염과 크론병 치료제 ‘펜타사(성분명: 메살라진)’, 야간 다뇨증 치료제 ‘미니린(성분명: 데스모프레신아세트산염)’ 등의 합성 호르몬 제제 의약품들을 지난 70년간 개발해왔다.

현재는 110여개 국가에서 페링의 제품들을 공급하고 있고, 약 6500명의 직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글로벌 연 매출은 2조 6천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 과학자의 ‘옹고집’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건강한 기업

페링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 중의 하나는 ‘작지만 건강한 기업’이다.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빚을 지고 시작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상장’하지 않은 상태다. 재무적인 요소들로 인해 ‘과학자의 신념’이 좌지우지되기 싫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가 지금의 위치로 성장하기까지 전체 매출액(Top line)은 굉장히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으나, 순이익(Bottom line)은 그렇지 않았다. 우상향 곡선 대신 횡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페링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빅파마들의 규모는 적게는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까지 차이가 난다. 똑같이 매출의 10%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규모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페링의 재무구조가 매출은 상승 곡선을 그리지만, 이익은 그렇지 않은 까닭이다. 주주들이 이윤을 많이 챙겨가는 대신에, 진정한 의미의 ‘환자 중심(patient-centric)’을 추구하며 힘든 환경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회사. 페링을 ‘작지만 건강한 기업’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 “우리는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둔다”

페링에 입사하면서 감명받은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둔다(People come first at Ferring)”라는 문구였다. 이 문구는 한 장으로 이뤄진 ‘페링 철학(One Page Ferring Philosophy)’에 가장 마지막에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우선, 환자를 의미한다. 환자의 생명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헌신이다. 그래서 난임과 불임에 관련된 치료제 영역에서 끊임없이 도전해왔고, 출산에 연관이 있는 영역에서 환자들의 생명과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해왔다.

혹자는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시대적으로 만혼이 늘어나고 갈수록 출산율이 낮아지는 ‘저출산 시대’인데, 페링이 추구하는 영역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출산율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글로벌 빅파마들은 이쪽 영역의 투자를 꺼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 분야에 여전히 투자할 수 있는 회사가 페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향점 끝에는 ‘사람’이 있고, 이 영역은 사람의 ‘생명’과 가장 직접적이면서 가까운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페링에게 있어 사람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직원’이다. 페링은 직원들을 정말로 사랑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페링의 초대 회장이었던 프레데릭 폴센 회장의 일화를 살펴보면, 이러한 부분들을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고(故) 프레데릭 폴센 회장이 가장 즐거워했던 것 중 하나가 회사의 직원들이 본인의 집에 놀러 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티타임이나 식사를 함께하면서 의약품의 개발과 생산과 같은 과학적인 부분, 환자의 치료법과 최신 의학 지식에 대한 생각 등을 나누고 공유하는 시간을 너무나 행복해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회사의 존재 목적은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있다고 생각한다. 직원을 위해 회사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계속해서 사업을 영위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엔 전제 조건이 있다.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원들이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이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바탕으로 회사에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것을 회사가 주저 없이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성장’이 이뤄지고 기업은 지속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 한국페링제약이 받은 대한적십자사 회원유공장 명예장
사진. 한국페링제약이 받은 대한적십자사 회원유공장 명예장

≫ 가장 주력하는 분야는 ‘생식의학’과 ‘모성의학’

페링이 주력으로 삼고 있는 분야는 단순히 산부인과 영역이 아니다. 출산과 생명에 포커스를 맞춰, 일상이 가능하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약품을 만드는 ‘생식의학(Reproductive medicine)’과 ‘모성의학(Maternal health)’이 페링의 주력 분야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9월 국내에서 출시한 난임 치료제 ‘레코벨(성분명: 폴리트로핀 델타)’이다.

레코벨은 최초로 인간세포주에서 유래된(Human cell line derived) 재조합 난포자극호르몬(rFSH)으로, 여성의 항뮬러관호르몬(Anti-Müllerian Hormone, AMH) 수치와 체중을 고려해 개인별 치료 용량을 결정하도록 개발된 의약품이다.

기존의 약들은 동물에서 배양한 세포주(Chinese Hamster Ovarian, CHO)를 사용하고 있는데, 만약 이 세포주가 동물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양된 것이라면 난임 치료에 있어 좀 더 의미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개발이 시작됐다.

이렇게 탄생한 레코벨은 AMH와 체중을 고려한 맞춤형 투여방식의 새로운 치료제로 유럽에서 난임 여성 132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3상(ESTHER-1)에서 레코벨 투여군이 대조군(플리트로핀 알파 투여군) 보다 최적의 난모세포수율(8-14개 난모세포)이 더 높았다. 또한 레코벨 투여군에서 채취한 난자 수 내에서 ‘좋은 배아(Good-Quality-Embryo)’에 대한 비율도 높게 나타났다.

안전성 결과에서도 중등 이상 난소과자극증후군(Ovarian HyperStimulation Syndrome, OHSS)이 발생하였거나 난소과자극증후군에 대한 예방적 치료를 한 환자의 비율에서, 레코벨 투여군이 폴리트로핀 알파 투여군 대비 유의하게 적게 나타났다.

≫ 마이크로바이옴,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

페링이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하고 있는 분야가 있는데, 건강기능식품 등에서 활용하고 있는 ‘마이크로바이옴’이다.

마이크로바이옴을 이용해 장내 유익한 미생물들로 하여금 크론병이나 만증 염증성 장질환 등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일상’을 가능케 하는 의약품이라는 것에 착안해 개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직 마이크로바이옴은 화장품이나 건강기능식품 등에 국한해 사용하고 있지만, 유익균과 유해균이 생성되는 원리나 질병 간의 연관성 등을 분석할 수 있어 신약 개발이나 불치병 치료제 등의 분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다.

≫ 치료 시기가 중요한 난임‧불임 환자…코로나19로 더욱 힘들었다

2020년을 이야기할 때, 코로나19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코로나19는 난임이나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힘든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병원을 내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고, ‘시기’가 가장 중요한 난임‧불임 치료에서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만 갔기 때문이다.

사실 사업(비즈니스)을 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치료 시기’는 그렇지 않다. 특정 시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임신의 경우 산모의 ‘나이’가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픈 일 중 하나였다.

다만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미안하면서 감사한 일이 하나 있었다면, 페링 그룹의 의약품 생산 공장이 이번 연도에 단 한 곳도 셧다운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페링은 전세계에 총 8곳에 의약품 생산 공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공장도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취급하는 의약품의 생산이 중단된다면, 환자들이 입는 피해가 막심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크론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치료제를 복용해야 하고, 성조숙증으로 힘들어하는 소아 환자는 적시 적기에 알맞은 투약이 이뤄져야 한다. 페링의 직원들은 이런 것들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노력했고 헌신했다.

≫ ‘탑다운’이 아닌 ‘바텀업’에서 시작된 코로나 지원

일반적으로 기업이 의사 결정을 할 때는 ‘탑다운(Top-down)’ 방식이 많이 이용된다. 최고결정권자가 먼저 결정을 내리면 그다음 실무자들이 나머지 사항들을 실행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대구‧경북 지역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들을 돕자는 의견이 사내 직원으로부터 나왔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마스크와 손 소독제 등의 방역 물품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던 터라 저조차도 회사 직원들을 위한 물품만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 발 더 앞선 생각이 나온 것이다.

즉시 해당 아이디어를 리더십 미팅에 안건으로 상정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당시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어 일정 기간 동안 성금 계좌를 개설해 모금을 진행했다.

이렇게 모인 성금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던 의료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방호복과 손 세정제 같은 방역 물품이 가장 시급한 상황이라고.

수소문 끝에 의미 있는 수량의 구호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직원들이 직접 포장해서 대구‧경북 지역에 전달했다. 이 모든 과정이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많은 기업들이 코로나19와 관련해 여러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텀업(Bottom-up)’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점이다. 진정으로 생명을 중시하고, 그 가치를 알았기에 이러한 제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작은 사례가 페링이 지향하는 ‘우리는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둔다(People come first at Ferring)’라는 철학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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