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약 ·정책팀 최선재기자
사진= 제약 ·정책팀 최선재 기자

대학 기숙사 생활 시절, 겨울이 올 때마다 가습기를 청소했다. 가습기 통에 깨끗한 물을 채운 뒤 뚜껑을 닫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살균제를 넣는 것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넣는 것을 잊어버리면, 언제나 선배의 날카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살균제도 안 넣고 뭐 했냐, 감기 걸리면 책임질 거냐”고 면박을 주었다.

2015년 11월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임산부와 어린이들은 폐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증상(폐섬유화)으로 고통을 겪다가 죽어갔다. 건강한 사람들도 피해를 겪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사망자는 239명으로 늘고 생존자 1528명은 심각한 폐질환을 겪고 있다. 최악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본격화된 이후, 대학 시절 사용한 살균제 브랜드가 ‘옥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폐섬유화의 전조증상인 마른기침으로 수개월 동안 고통을 겪어 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기침 증상은 좋아졌지만 당시 옥시 제품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피해를 입증하기도 쉽지 않았다. 선배의 카드로 옥시 제품을 샀기 때문에 구매 이력을 찾을 수도 없었다. 뉴스화면에서 옥시 참사가 나올 때마다 ‘살아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임산부나 영유아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지금 상상해도 끔찍할 정도다. 

이렇듯 ‘세균을 죽인다’는 명분을 지닌 ‘살균 제품’이 호흡기를 통할 경우 그 위험성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인과관계조차 입증하기 어렵다. 일상과 밀착한 형태로 주기적, 장기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제품 때문에 폐가 굳어졌다’라고 증명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의 증상발현이 개인마다 다른 점도 진상규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우리는 수많은 살균 제품들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카페, 식당에서 손소독제 사용은 필수다. 지하철역, 기차역에서도 손소독제 분무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치원은 물론 산부인과에서도 손소독제를 사용한다. 임산부와 영유아가 있는 곳에서도 손소독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지난 식약처 국정감사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들렸다. 시중에서 팔리는 손소독제 중 약 10%에 가습기살균제 독성성분 중 하나인 염화벤잘코늄이 함유됐다는 것이다.

환경부가 진행한 염화벤잘코늄 흡입 독성시험 결과에 의하면, 염화벤잘코늄을 지속적인 흡입 시 호흡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손소독제를 사용한 뒤 코나 입에 손을 대거나 손소독제를 분무 형태로 흡입한 경우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소독이 된다’는 믿음으로 손소독제를 사용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기는 소식이었다.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일상 안에서 수없이 손소독제를 사용해왔는데 오히려 독성 성분이란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위협’은 이뿐만이 아니다. 향균필름도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엘리베이터마다 붙어있지만 정작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향균 필름에 첨가된 구리 이온이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는 없다. 더구나 플라스틱 필름 안에 첨가된 구리 이온이 외부 바이러스와 접촉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향균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나 코로나19 대확산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들은 아파트와 빌딩 엘리베이터에 향균필름을 광범위하게 공급하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공급된 향균 필름은 수많은 지문이 찍힌 채로 방치됐다.

결국 향균필름을 엘리베이터에 부착한 의정부의 아파트에서 무더기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방역당국은 향균필름을 집단감염 매개체로 지목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설치한 제품이 또 다시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주범은 옥시를 포함한 제조사들이었지만 공범은 환경부 등 정부 당국이었다.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과 같은 독성물질이 호흡기로 들어올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간과하고 시판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다. 더구나 살균제들은 공산품으로 취급됐기 때문에 식품위생법이나 약사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정부의 소극적 태도가 참사의 불씨로 작용한 셈이다.

정부의 모습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새로운 위협’에 대해 뒷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등 방역당국은 향균필름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식약처 역시 염화벤잘코늄의 유통 현황을 파악하고 손소독제에 대한 새로운 행동지침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지만 미온적인 태도만 보이고 있다.

그 사이, ‘새로운 위협’은 지금도 우리네 일상을 무차별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손소독제, 향균필름 등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제품이 우리네 일상을 파괴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정부가 새로운 비극의 방조자이자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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