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 의약분업을 전제로 약대에 한약학과가 신설된 지 20년이 넘었다. 2000년 첫 국가시험을 시작으로 한약사는 매년 120명씩 배출되고 있다. 하지만 당초 계획대로 한방 의약분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생존 위기에 직면한 한약사들이 법의 허점을 이용, 약사의 직무범위를 넘나들면서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한의약정책과)는 최근 이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관련 단체들과 통합약사 논의에 본격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약사사회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통합약사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면 한약사들의 경우 급할 게 없는 모양새다. 최근 한약제제 분업과 첩약 급여화까지 거론되면서 한약사들의 숨통이 트일 조짐을 보이자 서둘러 통합 논의 테이블에 앉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일단 통합약사를 찬성하는 약사사회 쪽에선 무엇보다 현실적인 부분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약사들이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 위주로 한약국을 개업하면서 점차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데다 곧 있으면 전체 한약사 수도(2019년 2월 기준 2,550명) 3,000명을 넘어서는 만큼 더 이상 한약국의 확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서울지역 A약사는 과거 분회장을 역임하던 시절 자꾸 한약국이 들어선다는 민원이 빗발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일반약 수요가 많은 번화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약국이 병원을 끼고 있지 않아 문을 닫는 사례가 많았다. 매물로 나와도 인수할 약사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빈틈을 한약사들이 파고들었다”며 “한약국의 침투는 이미 위험 수위를 한참 넘어선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서울지역의 B약사는 “자금력이 되는 한약사들은 한약국을 차려 놓고 약사들을 고용해 처방전까지 받고 있다. 2% 부족한 약사법으로 처벌마저 어려운 상황이다”며 “과거에는 반드시 한약국으로 상호명을 써야 했지만 지금은 약국이라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한약제제, 일반약 구분이 명확하다면 분쟁이 덜 할 텐데 제약사, 정부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개선 노력이 없어 보인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약사회 전직 임원은 “통합에 대한 회원 정서는 연령층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젊은층은 반대가 많고 노령층은 찬성이 많다. 지금 상황에서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약국, 한약국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약사다. 약사직능을 위해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 집행부가 들어선 대한약사회는 통합약사에 대해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다만 정부의 최근 움직임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반대 입장을 숨기지는 않고 있는 상황. 

약사회 관계자는 “단순히 약사-한약사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만약 시민단체나 교육부에서 검증이 안 된 사람에게 어떻게 자격을 주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약사를 이원화한 지금 한약사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일단은 한약학과 및 한약사제도를 폐지해 새로 유입되는 선의의 피해자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 이 부분부터 정리하고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정부가 구체적인 방안을 먼저 내놓는 것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정책 실패와 책임 방기로 약사와 한약사 간 갈등이 촉발된 일인 만큼 관련 단체에 공을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설령 약사회가 통합에 찬성한다 하더라도 두 직능 간 면허범위가 다른 만큼 단체 혼자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일 또한 아니라는 게 약사회 내부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약사회 관계자는 “국민건강권이 위협받는 사안인데도 정부는 한약사의 일반약 취급을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약사 입장에선 굳이 협상 테이블로 나설 이유가 없는 만큼 통합 논의는 더욱 요원해 질 것이다”며 “정부는 면허라는 배타적 권리를 부여하는 주체다. 스스로가 면허를 느슨하게 관리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약사와 한약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하는 등 진정한 통합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여건부터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이 시각 추천뉴스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