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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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여성들의 응급피임약 접근성을 높이면 원치 않는 임신, 낙태 문제 등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보건당국 역시 피임을 위한 여성의 선택권 강화 측면에서 OTC 전환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다만 정부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의약품 이슈에 보다 세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사후피임약과 관련된 한 연구 논문이 주목 받고 있다. 응급피임약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성행위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의 협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논문은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문제에 대해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임신을 회피하기 위해 성관계 이후 72시간 내에 약을 복용, 수정란의 자궁내막 착상을 막는 원리로 작동한다. 국내의 경우 2001년부터 전문의약품(ETC)으로 허가됐다.

여성단체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주장해왔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12년과 2016년에 걸쳐 전환 정책을 추진해온 까닭이다. 하지만 보건당국은 의료계와 종교계의 반발에 부딪쳐 최종결정을 유보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보건당국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후(응급) 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이 다시 추진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보건당국이 정책의 논의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

한림대학교 조창익 경제학과 교수가 2013년 발표한 ‘미국의 응급피임약 판매정책의 변화와 여성의 성행위 변화양상에 관한 실증연구’는 보건당국이 주목할 만한 논문이다.

조 교수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이 2006년 응급피임약의 BTC(behind-the-counter) 판매를 허용한 시기 전후로 여성의 성행위 변화양상을 미국 청소년 추적 연구 데이터(NLSY97)를 토대로 분석했다. BTC는 의사의 처방전은 필요 없지만 구매 전 약사와 상담을 거쳐야 하는 약품을 의미한다.

이 연구 데이터는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구축된 자료다. 조 교수는 18세 이상 여성들이 응답한 설문을 바탕으로 성행위 경험 유무, 복수의 성관계 상대와 성행위 여부 및 그 형태 등을 ‘응급피임약’과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조창익 교수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일단 미국에서 응급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이후, 미혼 여성들은 복수의 성관계 대상을 가질 확률이 감소했다. 조창익 교수는 ‘협상력 약화’를 이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조 교수는 “남성은 사후피임약을 보다 쉽게 구입해 임신이 될 확률이 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며 “즉 여성은 콘돔 사용을 통해 성병감염으로부터 안전한 성행위를 남성에게 주장할 수 있는 협상력이 떨어지게 된다.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창익 교수에 따르면, 미국 남성들의 경우 사후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상대방 여성이 임신의 위험 때문에 성행위를 거부할 것이라는 위협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결국 여성은 콘돔 없는 성행위를 수락하거나, 성행위를 거부해야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한다.

때문에 여성과 남성은 장기적으로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채 성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은 성병 감염 위험의 최소화를 위해 더욱 금욕적인 성생활을 하거나,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성관계 상대의 숫자를 줄이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는 것.

아울러 복수의 성관계 상대를 계속 유지하려는 미혼 여성들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조 교수의 설명이다.

조창익 교수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응급피임약의 유용성 증가는 일부 여성들에게 콘돔 사용으로 성병을 예방할 수 있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발생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응급피임약에 대한 접근성 강화가 일부 여성들의 ‘도덕적 해이’의 원인으로 작용해 성병 감염의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결론인 것.

결국 조창익 교수 논문의 핵심은 응급피임약이 오히려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를 하도록 만들어 여성들이 성병 감염에 노출될 위험이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창익 교수는 “응급피임약의 유용성 확대 정책의 본래 목표는 원치 않는 임신을 막고 임신중절을 낮추는 것이다”며 “하지만 일부 집단에서는 성병 감염의 증가와 예기치 못한 공중보건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응급피임약을 이용하는 여성들에게 위험에 대비하는 다각적인 방안(교육, 캠페인, 의약품 포장에 경고문구의 삽입 등)을 강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낙태죄 폐지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낙태약 합법화 등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의약품 관련 이슈가 터져 나오는 시점이다. 조창익 교수가 과거에 논문을 통해 언급한 일종의 ‘경고카드’를 보건당국이 더욱 유념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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