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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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 해외 각국에서 로봇이 약을 조제하는 것은 일상이다. 약사의 전유물이던 약물 조제를 로봇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일부 병원에서 점차 로봇을 약물 처방에 활용 중인 가운데 약사 사회에서도 ‘조제 로봇’에 대해 호의적인 분위기가 읽히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최근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10년에서 20년 이내에 현재 직업의 절반이 없어진다고 발표했는데 사라질 직업 명단 중에 약사는 6위를 차지했다. 조제 로봇 시스템으로 인한 4차 산업 혁명 때문에 약사 일자리의 전망이 어둡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옥스퍼드대학교의 경고대로 4차 산업혁명은 약사에게 치명타를 안겨 줄까.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답의 힌트를 미국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2014년 10월 미국 루이지애나 주 배톤루지에 있는 미드시티 약국에선 환자들이 처방전을 내고 약을 받는 대기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조제 로봇’인 커비레스터(Kirby Lester)가 처방전에 따라 정확하고 신속하게 약을 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비는 먼저 병원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약국으로 들어온 처방전을 바코드로 인식한다. 커비가 처방전에 적힌 바코드에 따라 약을 선택한 뒤 봉지에 채운다. 라벨을 붙여서 내놓으면 약사들이 조제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약봉지를 밀봉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커비 덕분에 약사들의 복약 지도 시간이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 약사들이 약효, 부작용, 약품 간의 상호작용, 복용 방법 등에 관해 환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불필요한 대기시간도 줄었다. 조제 로봇의 도입으로 약사들이 더욱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은 로봇 조제 기술이 가장 앞서 있는 나라다. 세계 최초로 로봇을 도입한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는 약화 사고 예방을 위해 2010년 1월 로봇 조제 약국을 열었다. 로봇 조제 약국에선 25대의 로봇이 조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약사회가 로봇 조제 시스템 확대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 내에 로봇 조제 시스템이 도입됐지만 병원약사 4명은 여전히 근무 중이다. 앞서 옥스퍼드대학교가 경고한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소외’ 현상이 약사 영역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센터의 약사들은 단순 조제 업무에서 벗어나 약물 간 상호작용 혹은 부작용 가능성을 더욱 면밀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약사 역할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2015년 기준 미국 병원약국의 일반 조제업무의 97%가 자동화됐고 600병상 이상 병원 중 로봇 조제 비중이 37%를 차지하고 있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국내 약사들의 조제 로봇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약사의미래를준비하는모임(이하 약준모) 임진형 회장은 “항암제 조제 로봇은 무조건 들여와야 한다”며 “항암제는 발암물질이라서 약사들도 조제를 하다가 찔리면 기분이 나쁘다. 임산부인 약사들이 항암제 조제를 기피하는 이유다. 심지어 지방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불법적으로 항암제를 조제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로봇이 기술적인 부분을 대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삼성서울병원은 2015년 9월 이탈리아 루치오니 그룹의 의약품 조제 로봇인 ‘아포테카 케모’를 도입했다. 아포테카 케모는 병원 내에서 하루 평균 항암제 30개 품목을 100여건 조제한다. 베테랑 약사의 2~3명 몫을 한꺼번에 수행 중이다. 아포테카 케모를 시작으로 국내 대형 병원들도 항암제 조제 영역에서 로봇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빗장이 조금씩 풀리면, 로봇 약국의 보편화는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이 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경고대로 국내 약사들이 직장을 잃고 약국이 폐업하는 사태가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사 사회에서는 오히려 조제로봇이 약사의 능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미국약사회의 입장과 같은 맥락이다.

약준모 임진형 회장은 “조제가 한 번 잘못되면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로봇은 오류를 잡을 수 있다”며 “일선 병원의 약사들은 단순 조제 업무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히려 그런 업무를 로봇이 해서 사고 위험을 줄여야 한다. 동시에 약사들이 약물의 상호작용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면 환자에게도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의 이동근 정책팀장 역시 “이미 웬만큼 크거나 바쁜 약국은 자동조제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며 “조제 로봇이 도입된다면 기계는 처방전대로 약을 짓는 역할을 전담하고, 약사는 환자에게 상담을 충실히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찬성 입장을 나타냈다.

각국의 약사 사회가 조제 로봇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걸까. 세계 각국에서 조제 로봇의 도입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2017년 1월엔 로봇 약국이 아랍에미리트(UAE) 최초로 두바이에 있는 라시드 병원에 등장했다. 일본 BD(Becton Dickinson)는 지난 3월 약국에서 의약품을 입고하고 선반에 정리하는 일을 해주는 약국로봇을 발매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병원 곳곳은 물론 개인 약국에서도 ‘조제로봇’이 등장하는 모습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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