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것은? 넌센스 퀴즈가 아니다. 동숭동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신미경 작가의 전시회 제목이다. 제목의 아리송함에 이끌려 전시회장을 찾았다. 일명 대학로로 더 잘 알려진 동숭동은 지금은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서울대학교가 있던 곳이며 학교가 이전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대학로로 불리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는 예전에 비해 화려함을 더 입고 부산함이 더해지긴 했지만 마로니에 공원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 색 벽돌 건물만큼은 변하지 않고 여전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붉은 색의 아름다운 이 건물은 아르코 예술극장과 아르코 미술관이다. 막힘없이 연결되는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던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답게 공원에서 몇 개의 계단만 오르면 건물로 바로 연결돼 마치 마당에서 방안으로 드나들 듯 서로 연결된 하나의 공간같은 느낌을 준다. 아르코 미술관은 국내에 미술관이 부족하던 1970년대에 미술단체나 개인전을 지원하기 위한 기획 전시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개관한지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실험적인 기획전이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비에 녹고 바람에 풍화돼 사라지는 조각

 

미술관 내부에 들어가기 전, 외부에 전시돼 있는 조각상에 먼저 눈이 갔다. 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일렬로 놓여 있는 조각상들은 심지어 땀을 흘리듯 몽글몽글한 물기까지 보인다. 이것은 신미경 작가의 작품 시리즈 중 하나인 ‘풍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비누로 만든 조각상을 외부에 설치한 뒤 그 조각상이 놓였던 장소, 기후, 외부 환경과 시간, 계절 등의 조건에 따라 변화되는 과정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만드는 작품이다. 이렇게 외부에 놓여진 작품은 비누라는 소재가 가진 특성상 비와 바람에 풍화돼 짧은 시간에도 마치 오래된 유물같은 조각상으로 변하게 된다. 예측 불가능성을 작업의 근간으로 하는 또 다른 작품 시리즈는 화장실 프로젝트이다. 이 작품은 각 문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시대의 흉상이나 불상을 비누로 만들어 화장실에 설치한 뒤, 관객들이 그 조각을 비누로 사용하면서 닳아져 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정 시간동안 비누로 사용됐던 조각들은 다시 수거돼 작품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전시해 놓은 작품들을 보니 실제로 예측불허의 모습이다. 얼굴과 몸의 일부가 닳아 없어져 하나의 추상작품이 돼버린 불상과 코와 귀가 뭉툭해져 형체가 모호해진 흉상 등. 이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인식의 차이도 보여준다. 프로젝트 초기에 동양 문화권의 화장실에 놓아 둔 불상과 서양 문화권에 놓아 둔 조각상을 사람들이 잘 만지지 않아 서로 바꿔서 작업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술작품의 실체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비누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마음껏 만지며 사용한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 수거하고 나면 그 조각상은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작품이 되는 것.

 

비누가 조각이 되기까지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신미경 작가의 작품 소재는 비누이다. 20여년전 유럽의 박물관에서 섬세하게 조각된 조각상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화강암과는 다른 부드 럽고 무른 질감의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작가는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에서 비누의 표면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이후로 20여 년간 비누를 이용해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작가는 주로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이나 아시아의 도자기나 불상을 재현하고 풍화 프로젝트와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물에 쉽사리 녹아내리고 바람에 풍화되는 유약한 소재인 비누를 이용해 조각작품이 지니는 권위와 견고함에 의문을 던진다.

 

응축된 시간

작가가 최근에 새로 시작한 작업은 폐허풍경이다. 건축과 조각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작업은 집이라는 건축물이 반으로 잘라졌을 때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있는 건축물 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 하고 하나의 거대한 조각이 돼버리는 것을 표현했다. 전시장 1층에 비누 벽돌로 설치된 폐허 구조물은 규모가 큰 유물로서, 어느 순간 멈춰버린 시간을 나타낸다. 이와 더불어 주변에 마치 폐허 건축물에서 발굴한 유물 같은 토기 형태의 비누 도자기나 부서진 비누 조각, 풍화로 닳아버린 조각, 오래돼 금이 생긴 건물 조각, 미이라 같은 인체 형상 등을 전시장에 배치해 ‘화석화된 시간’을 시각화했다. 이 작품은 2층에 전시돼 있는 부식된 도자기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마치 오랜 세월 바다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 도자기들은 작가가 도자기에 동박이나 은박을 씌워 스스로 부식하게 만든 것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은 짧은 시간 동안 ‘응축된 시간’을 보여 준다. 마로니에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3층에 가면 세미나실을 겸한 휴식공간이 있다. 그 곳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변한 듯 보이던 대학로에는 여전히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커플들이 있고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와 오후 한 때를 보내는 가족이 있으며 콩트와 마술을 하며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옛 생각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넌센스 퀴즈처럼만 들렸던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그것은, 지나갔지만 영원히 내 마음 속에 존재할 추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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