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9돌 특집Ⅱ]선택 아닌 필수 ‘오픈 이노베이션’
정해진 공식이 없는 오픈 이노베이션
김경호 SK케미칼 상무 


에피소드

<하나>

30여 년 전의 일이다. 입사할 때의 긴장이 많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사회생활의 시작은 우려했던 것보다 매우 인간적이었고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는 계기가 생겼다. 경쟁업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상대는 국내 최대의 대기업이었다. 분위기는 전투적인 긴장상태로 돌입했다.

순식간에 두 회사 간에 경쟁품목이 여럿이 생기면서 분위기는 더 심해져갔다. 업무를 하다 보니 경쟁업체의 정보가 필요하게 됐다.

의약전문지에 나온 그 회사의 광고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 후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내가 다니던 회사와 전화를 받던 회사 두 곳 모두. 당시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상사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라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이유인 즉 정보가 새나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정보를 얻으려고 전화를 했는데 어떻게 이곳 정보가 새 나가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경험이 없어 이용당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이런 정보가 필요하니 경험이 많은 선배직원이 좀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자 그는 대답대신 신경질을 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둘>

복지부 약정국시절의 일이다.
한 초로의 신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양복을 입고 공무원과 상담하고 있었다. 마침 할 일이 없던 나는 옆에서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 신사 분은 어느 산골에서 약초를 재배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키우는 약초가 어떤 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주위에서도 사용해 보고 사용해 본 사람들이 약으로 개발해 허가를 받아 다른 사람들이 개발하지 못하게 하라고 조언을 한 듯 했다.

담당 공무원이 아주 점잖게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알겠는데요. 자료를 보자니까요. 이건 비밀이라 보여줄 수가 없어요. 자료를 보여주면 이게 다른 데로 새나가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80년대, 심지어는 90년대에도 과천에서는 가끔씩 유사한 광경이 목도되곤 했었다.

왜, 오픈 이노베이션?

위의 두 가지 에피소드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일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보안은 현재도 어떤 종류의 산업을 막론하고 가장 우선시하는 회사의 방침이 되고 있다.

특히 지적재산권이 중요시되는 제약업계의 경우 보안에 대한 기업방침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이는 위의 두 번째 에피소드처럼 이 분야에서는 아직까지도 개인 간의 대화에서조차 정보나 지식에 관해서는 지극히 말을 아끼는 풍토가 팽배해 있다.

실제로 상대방과의 대화도중에 나오는 단편적인 데이터나 자료가 치명적인 말실수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개발에 대한 R&D는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워지고 있으며 심지어 정신과 약물의 경우 신약이 하나 나오면 학회가 생길 정도가 된 지 오래다.

일본의 한 의약전문지에서 점점 어려워져 가는 R&D의 실태를 금광에 비유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데 초기에는 노천광 또는 굴을 조금만 파도 금맥이 보이던 제약 R&D 초기와는 달리 이제는 웬만한 건 다 채광이 끝난 상태라 굴을 파도 아주 깊게 파들어 가야하고 그래서 확률도 낮아지고 상대적으로 위험성도 커지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제는 개인이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워져 팀웍이나 시스템이 필요해지듯이, 기업 역시 개별기업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시절이 왔다.

20여년전부터 유럽과 미국제약산업에는 M&A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지금도 그 분위기는 진행 중이다.

M&A는 결국 돈을 주고 시간과 제품을 사는 작업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업계에 오픈 이노베이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오픈 이노베이션이란 외부기술과 지식을 활용해, 다시 말해 돈을 주고 기술과 지식을 사서 연구기간을 절약하고 제품의 성공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시간 절약과 성공확률의 불확실성 측면에서는 M&A만큼은 못하지만 오픈 이노베이션은 M&A보다 상대적으로 돈이 덜 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한 몸이 되거나 같은 편이 됨으로써 몸집을 불려 경쟁자수를 상대적으로 제한시켜 제3의 진입을 최소화시키고 Winners take it all or bigger pieces of pie를 지키기 위함이다.

극복해야 될 허들

▶오픈?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방점은 당연히 <오픈>에 찍힌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기업정서가 오픈에 매우 민감하다는 점이다. 오픈했다가 또는 믿었다가 까딱하면 속는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흐름을 크게 학계(벤처)~소기업(벤처)~제약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본다면 초기단계의 기술을 가진 쪽에서는 기술유출을, 후반부로 갈수록 데이터의 신뢰성이나 재현성에 대한 우려가 크다.

전자는 오픈 시 잘못되면 손도 못쓰게 기술이 유출이 되는 상황을, 후자는 feasibility가 안 돼 상품화가 실패되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오픈에는 자신감, 상호신뢰,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치려면 시간이 걸려야 한다.

▶실패? No 옵션

더 큰 사회적 관습이 있다.
우리나라 제약사는 신약개발의 경험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말은 10만개 물질 중에 몇 개를 고르고 10년 이상 연구를 해야 성공확률이 1/100에 불과하다는 글로벌 신약개발식의 발표를 하지만 정작 자기 회사로 돌아오면 이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나라 제약업계에서는 실패라는 옵션은 사실상 인정되지 않는다.

신약개발의 경험이 많은 회사들은 실패한 약물마다 후보물질(next candidates)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첫 시도가 실패를 해도 제2의, 제3의 신약개발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많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신약개발의 실패는 대개 그걸로 끝이다.

임신부 입덧치료제로 개발됐다가 기형아출산이 원인이 돼 약물 안전성의 반면교사가 됐던 탈리도마이드가 개량제형으로 개발돼 항암제로 부활하기도 하지 않는가.

▶내부관리

각 분야에서 앞서가는 기업들이 내세우는 광고 중에 <연구부터 판매까지>, <전공정을 XXX사의 노하우> 등의 한 회사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을 프라이드로 내세우며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 것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NIH(not invented here)는 제법 감동적인 울림을 주기도 했고 묘하게 우리의 내셔널리즘과 맞아 떨어지는 면도 있었다.

한편 기업의 내부인력은 외부의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성공적으로 활용될 경우 내부조직의 해체나 축소, 인력/예산상의 불이익으로 조치가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동하기도 한다.

학회나 미팅에 가면 나만이 옳고 다른 접근법은 모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본인만 모른다. 아니면 동일 내용을 반복하면서 이미 은사특권이라는 자신의 신앙으로 굳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오픈 이노베이션 실제 사례

▶반면교사

일등주의를 표방하는 기업들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외부의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가볍게 보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그 가치여부를 떠나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는 종종 시대의 흐름을 냉정히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고집만 내세우다 우물안 개구리가 돼 실패를 겪기도 한다. 



▶다국적제약사의 사례

▷ 로슈
로슈 본사 그리고 제넨텍, 쥬가이제약으로부터 나오는 역량 이외에도 오픈 이노베이션과 관련해 150개가 넘는 파트너를 관리하고 있는 동사의 경우 전체 매출의 35%가 파트너사로부터 나온다. 전세계에 걸쳐 45개 대학과 협업관계를 이루고 있고 2014년에만 55개의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 아스텔라스
학계와 벤처 그리고 동종업계의 다른 제약사, 국가 연구기관을 기본으로 벤처, CRO, IT회사까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동사의 특징은 초기단계의 찾아다니는 사냥형 오픈 이노베이션(Hunting type)에서 육성해서 활용하는 농장형(Farming type)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진화한 형태로 정보나 기술 뿐 아니라 사업개발을 위한 인력도 상호 간에 오픈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전문지식, 다양성, 효능을 추구하고 있다.

▷ 베링거 인겔하임
파트너링은 회사의 주요전략으로 discovery와 development 분야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개발단계의 초기-중기 파이프라인 50% 이상이 외부 파트너로부터 수혈되고 있다.
따라서 R&D의 전체 단계에 걸쳐 외부의 이노베이션이 내부 조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뇨분야에서의 릴리와 연계
동사의 풍부한 당뇨약 파이프라인과 릴리의 세계최초의 인슐린개발, 100년간의 당뇨분야에서의 경험이 협력하면서 치료제개발에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

·Zealand Pharma(Denmark)와 협력
대사성질환과 펩타이드 케미스트리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양사의 협조이다.

·Pharmaxis(Australia)
동사의 비알코올지방성간염(NASH)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 Pharmaxis의 새로운 물질과 결합한 형태이다.

▷ MSD
과학적 진보의 중심지인 영국, 미국서부, 유럽, 동아시아지역(한국, 일본, 중국, 싱가폴, 호주)에 허브를 형성해 로컬 리딩 과학자 또는 회사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동사의 파이프라인을 보충하기 위해 이들 지역에서 기회를 찾고 있으며 MSD 내부의 과학자들은 외부의 학계 및 바이오회사들과 직접, 질 높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주로 MSD가 전문성이 있는 영역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외부기관의 다양한 지적, 과학적 자원을 흡수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도 가동하고 있다.

▷ GSK
학계 특히 대학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전략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모델을 구축해 다양한 파트너 기업과 연계하고 있다.
초기단계에는 기업에 펀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작해서 점차 자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결합시켜 시너지를 창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 화이자
20-25명 규모의 인력을 대학단위로 구성을 하고 이에 대한 비용을 제공하면서 학교에서 연구책임자와 연구진을 투입하게 한다.
기업과 학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제품이 개발되면 지적재산권은 공동소유하고 판매권은 화이자가 보유하는 방식이다.

맺음말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버클리대학의 체스브로 교수가 2003년 저술한 <Open Innovation : The new imperative for creating and profiing from technology> 책이 출간된 이후부터라고 하지만 사실 이 개념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사고나 전략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과거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이 생각에 큰 차이가 없듯이 기업들 역시 여러 가지 형태로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또는 동일한 행위를 상호 협력이라는 형태로 해오고 있었다.

제약업에서 우리가 익히 사용하고 있는 공동개발, 전략적 제휴, 네트워크, 파트너링, 코마케팅, 코프로모션, 라이센싱인/아웃, option agreement 등의 용어들 역시 모두 협력이라는 관점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과 전체적으로 내지는 부분적으로 유사한 개념이다.

혹은 이제까지 사용해오던 모든 협력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용어가 등장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오픈 이노베이션은 모든 것을 자체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오랜 산업의 고정 관념인에 대한,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했던 R&D로 대표되는 제약분야의 접근방식과의 충돌일 뿐이다.

회사는 종종 유기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외모와 관심, 역량이 다 다르듯이 오픈 이노베이션의 방식은 <오픈>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회사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오픈을 해야 할 지, 어느 부문을 오픈을 할 지, 누구에게 오픈을 할지는 사정에 따라 정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오픈>의 핵심은 지적재산권을 비롯해 기술과 아이디어, 즉 데이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파트너끼리도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상을 어떻게 받을 것인지 또는 어떻게 해 줄 것인지가 확실해야 한다.

그동안 기업내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왔던 대부분의 기업들에게 결코 쉬운 변화가 아니다.

특히 파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신뢰를 높여야 한다. 사는 입장이 이후에 해결해야 할 부담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나라 기업은 학계나 벤처에 지분투자 수준이 많겠지만 외국기업과의 오픈 이노베이션에서는 파는 입장에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따라서 데이터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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