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지아/자료제공 아리지안

맑고 쾌청한 하늘, 울긋불긋 예쁘게 물든 산, 잘 여문 벼들이 수확을 기다리는 황금빛 들판,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채워주는 가을 풍경들이다. 그리고 또 어느 한편에서는 향긋한 꽃 내음이 몰려온다. 가을의 꽃인 국화꽃 향기가. 국화차, 국화 주, 국화전, 국화 모양의 빵과 과자 등을 비롯해 영화 ‘국화꽃 향기’,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일본 문화를 다룬 책 ‘국화와 칼’… 등등 국화는 너무나 친숙하고 친근한 꽃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꽃들 각각의 이름이나 생김새는 잘 몰라도 국화는 알아볼 수 있다. 흰 국화, 노란 국화, 빨간 국화처럼 국화는 장미처럼 색도 다양하고,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꽃이 장미라면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꽃은 국화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황실 문집으로 서경(書經)이라고도 불리며 국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있다는 상서(尙書), “여궤(산해 경에 나오는 여신)의 산에 국화가 많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는 중국의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 “아침에는 목란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꽃을 씹는다“라는 글귀가 있는 초나라 때의《초사(楚辭)》등이 모두 BC 3,4세기경의 것들임을 감안하면 국화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화가 군자의 기품을 상징하는 사군자의 하나인 것은 대부분의 꽃들과 달리 서리가 내리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에도 꺾이지 않고 홀로 굳건히 피어있는 모습에서 지조와 절개, 고고한 기품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화의 고고함을 무릉도원을 노래한 중국의 대표 시인 도연명은 ‘상하걸(霜下傑, 서리속 에서도 꿋꿋한 호걸)’이라 하였고, 소동파는 ‘상중영(霜中英, 서리 속의 영웅)’이라 표현했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영국 (詠菊)’이라는 시를 통해 국화의 고고한 모습을 담아냈고, 조선시대 문신 이정보는 <국화야 너는 어이>라는 시에서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이라 표현했다.

서리를 견디는 자태 외려 봄꽃보다 나은데 / 삼추를 지나고도 떨기에서 떠날 줄 모르네

꽃 중에서 오직 너만이 굳은 절개 지키니 / 함부로 꺾어서 술자리에 보내지 마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三月東風 ) 다 지내고

낙목한천( 落木寒天 )에 네 홀로 픠였는다

아마도 오상고절( 傲霜高節 )은 너뿐인가 하노라.

위의 표현들처럼 국화는 유교적 관념에서 의(義)를 지켜 꺾이지 않는 선비정신과 일치하는데, 은일화(隱逸花)라 하여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은자(隱者)에 비유하기도 했다. “구자나 한 장 들고 나 봐~/ 구월이라 국화꽃/ 화중군자(花中君子) 일러있고” 전남 무안 사람들이 부르던 각설이타령의 한 대목이다. 지조와 절제, 군자를 상징하는 국화의 상징성은 선비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 국화는 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에는 중양절이라 하여 음력 9월 9일에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고, 황국(黃菊)은 신비한 영약으로 달여 마시면 장수한다고 하였으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환갑•진갑 등의 헌화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이다. 이 시를 통해 보면 국화는 인고의 꽃, 완성의 꽃이다. 봄에 소쩍새가 울지 않았다면, 여름에 천둥이 울지 않았다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소쩍새가 우는 봄부터 꽃이 피는 가을까지 온갖 고뇌와 번뇌, 고통을 인내하며 찬바람 속에서 의연하게 꽃을 피워내는 국화는 우리의 인생, 평생의 삶과 닮았다. 장례식장에 흰 국화를 헌화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난무하지만 난 이러한 국화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깊어가는 가을, 향긋한 국화차와 함께 두달 남짓 남은 2018년 한 해를 차분히 정리해보고 곧 시 작될 새로운 한 해, 흐르는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는 나만의 라이프플랜을 세워보는 일도 가을과 겨울의 중간인 지금을 잘 보내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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