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leeheekyoung@hotmail.com)

나의 게으름도 빛을 발할 때가 있으니 요즘이 딱 그런 때인 듯하다.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하며 겨울 옷 정리를 미루어 온 덕에 봄철 한 가운데서도 가던 길 되돌아 온 듯한 겨울날씨를 맞아 옷장 속 따뜻한 외투를 다시 꺼내어 입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 속에도 겨울과는 다른 훈풍이 느껴지는 걸 보면 봄은 봄이다. 최근 들어 훈풍은 계절과 상관없이 사회에도 부는 것 같다.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뉴스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마땅한 자연의 섭리가 우리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보곤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고암 이응노 작가도 생존하신다면 이러한 훈풍을 누구보다 반긴 사람 중 한 분일 것이다. 1989년 호암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첫 전시회조차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 해 참석하지 못하고 이틀 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 작가는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정부에서 외면 받았고 한 동안 그의 이름이 여론에 거론되는 것조차 금지되는 힘든 세월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본인의 이름을 건 이응노 미술관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으니 어쩌면 훈풍은 이미 불어온 듯 하다.

그림을 통한 동양사상 전파

이응노 작가는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도쿄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일본화와 서양화를 전공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몇 차례 입선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 이후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자는 다짐을 하고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홍익대학교 동양화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쓴 그의 저서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에서는 붓, 먹, 한지라는 전통재료가 옛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과 만나 어떻게 새로운 그림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를 기술하기도 했다.

1950년대 그의 작품 ‘생맥’을 보면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히고 설켜 뒤엉켜 있는 모습이 반추상화법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이러한 그의 독창적인 시도를 눈 여겨 본 뉴욕과 파리의 화단에 의해 해외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그는 1958년 쉰다섯의 나이로 파리로 터전을 옮기게 된다.

그가 파리 행을 택한 것은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동양의 정신사상을 전파하고자 했는데 실제로 그는 파리근교에 동양미술학교를 만들어 3000명이 넘는 화가 및 일반인에게 동양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념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순수하게 예술활동에만 매진하던 그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계기는 동백림 사건이다. 6.25때 헤어져 북한에 살고 있는 아들과 만나게 해 준다는 말을 듣고 북한 대사관 직원을 두어 번 만난 것이 원인이 돼 간첩 누명을 받은 그는 1967년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독방에 갇혀 답답한 생활을 하면서도 먹다 남은 간장을 이용해 화장지에 그림을 그리고 밥알을 짓이겨 작품을 만들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수감 직후부터 지속된 국내외 예술계의 끊임없는 탄원서 덕에 2년 만에 풀려난 그는 불행하게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 했다.

이응노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곳들

우리나라에서 이응노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홍성에는 그가 어린시절 살던 집터에 만든 ‘이응노의 집’이라는 기념관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의 초기 구상작품 및 젊은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유품을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곳으로는 수덕여관이 있다. 수덕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수덕여관은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한 직후부터 파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약 한 달 동안 요양생활을 했던 곳이다. 요양기간 중에도 작품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 했던 그는 여관 앞에 있는 너럭바위에 당시에 몰두했던 문자추상을 암각화로 새겨 놓았다.

이번에 ‘추상의 서사’라는 주제로 그의 대표적 추상작품을 전시한 이응노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가장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보두엥 (Lauren Beaudouin)이 이응노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한 미술관은 뒤로는 한밭 수목원을 두고 앞으로는 잔디밭이 넓게 깔린 야외정원을 두고 있어 경관 또한 뛰어나다. 대전시에서 운영하는 이곳에는 1950년대에서 80년대까지 그가 작업했던 회화, 꼴라쥬, 조각, 태피스트리 등 대표작품들이 소장돼 있다.

이응노의 작품 세계

전시작품 중에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문자추상’이다. 서예(書藝)를 하나의 예술세계로 보았던 그는 서예의 점과 획, 여백을 이용해 글씨 같은 그림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문자추상의 시작이다.

문자추상의 대표작 중 하나인 ‘64주역 괘차도’를 보면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글씨 같은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팔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도 보이고, 콧수염이 난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 심지어는 포효하는 듯한 공룡의 모습도 보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한자를 기반으로 하던 그는 여기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더하고 해와 달과 비슷한 것 등을 가미하는 작업을 통해 문자추상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와 함께 작업의 소재도 다양해졌는데, 가구에 문자추상을 새기거나 태피스트리로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 그가 몰두했던 작품은 ‘군상’이다. 하얀 도화지위에 역동적인 붓놀림만으로 표현한 수백, 수천의 사람들은 환희에 차 신명 나는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싸우는 것 같기도 하며 어디론가 우루루 몰려가는 성난 군중의 움직임 같기도 하다.

군중의 무리를 보고 있자니 한지를 꿰뚫고 나오는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사람을 그리게 된 계기는 1980년대에 있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희생돼 가는 장면을 먼 이국땅에서 TV를 통해 보던 작가는 이들의 넋을 위로하며 그들의 외침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 그가 타계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 간 지속됐던 ‘군상’시리즈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아 보인다. 직업의 차이도 없고 빈부의 차이도 없으며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다. 계급장 떼고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듯 닮은 몸짓은 화폭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군무로 완성된다. 그는 생전에 이것을 우리 민족이 만들어 내는 ‘통일무(統一舞)’라고 불렀다.

미술관을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야외정원에 우뚝 서 있는 조각상이 보였다. 제목은 ‘다시 일어서는 땅’. 비어 있던 그의 가슴에 훈풍이 지나갔는지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나도 이제는 봄맞이 준비, 아니 벌써 여름 맞이를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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