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leeheekyoung@hotmail.com)

연말연시를 맞아 한가하던 나의 일정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숫자 위에 여기 저기 내려앉은 동그라미들이 직장을 그만둔 지 서너 해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바쁜 생활 탓을 하며 서로에게 무심했던 지난 열 한 달 동안의 소원함도 12월 한 번의 만남으로 상쇄될 수 있는 실로 마법 같은 연말연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는 늘 일상 같은 레퍼토리로 예전 이야기를 읊을 뿐인데 매번 새롭다. 때로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서로를 수정해 주기도 하고, 또 다른 기억에 덧칠을 하다 보면 어느 새 ‘기억’은 ‘추억’이 된다.

오늘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번 만나 밥 한 번 먹자’는 말만 2년 넘게 주고받던 사이라 연말연시를 핑계 삼아 둘만의 송년회를 하기로 했다.

마침 후배의 지인이 오픈했다는 식당이 과천에 있어 그 곳에서 점심을 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당역으로 이동했다. 이같은 동선은 사당역 근처에 남서울미술관이 있고 그 안에 아담한 카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하철 사당역 6번 출구로 나와 미술관 쪽으로 걷다 보면 어느 새 과거로 순간이동을 한 듯 고풍스러운 신고전주 양식의 멋진 건물과 만나게 된다. 그 곳이 바로 이제는 미술관이 된 舊벨기에 영사관, 남서울미술관이다.

미술관으로 변신한 벨기에 영사관

舊벨기에 영사관은 대한제국기인 1905년에 만들진 오래된 건물이다. 그 시기의 영사관들이 주로 정동부근에 밀집해 있던 것과 달리 벨기에 영사관은 중구 회현동에 지어졌다. 대한제국 시기에 맺은 외교권의 대부분이 열강의 이권에 따라 강제로 맺어진 것이었다면 벨기에는 고종황제의 요청에 의해 외교를 맺게 된 유일한 나라이다.

독일과 프랑스라는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중립국가로 주권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벨기에가 고종황제가 원하던 중립국의 외교적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05년 맺어진 을사조약과 함께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되며 고종황제의 중립국에 대한 바램도 무산된다.

게다가 주인을 잃은 벨기에 영사관도 다른 용도로 사용되거나 방치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198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됐고 2004년에 서울시립미술관 분관으로 재탄생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망각에 붙이는 노래

미술관 내 카페를 찾았지만 이제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문만 붙어있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잠시 접어두고 후배와 함께 미술관 산책에 나섰다.

2018년 2월 25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의 주제는 “Ode to Forgetting”. 한국어로 “망각에 부치는 노래”로 번역된 이 문구는 전시작품 중 하나인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제목 “Ode a l’oubli (망각의 시)”에서 인용했다.

우리나라의 리움 미술관을 비롯해 전 세계의 주요도시에 전시된 ‘마망’이란 이름의 커다란 거미 조각가로도 유명한 루이즈 부르주아는 1911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태피스트리 수선을 하던 가업의 영향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던 그녀는 어느 날 친언니처럼 가까웠던 영어교사와 아버지가 오랜 기간 동안 불륜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맞서지 못 하고 침묵과 묵인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위선적인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은 어린 시절 그녀에게 마음의 큰 상처로 각인된다.

그녀가 “나는 예술작품을 통해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듯 이후로도 평생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지속적으로 예술작품을 하게 되는 동력이자 밑바탕이 됐다.

상처와 기쁨이 어우러진 새로운 창조물

이렇듯 다소 어둡고 냉소적인 주조를 띠던 그녀의 이전 작품과 달리 현재 전시되고 있는 작품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며 귀엽고 사랑스럽다.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인 2004년에 만든 이번 작품 “Ode a l’oubli (망각의 시)”는 그녀가 결혼 후부터 노년이 되기까지 일상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의류를 자르고 꿰매어 만든 36장의 그림책이다.

이제 생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에 그녀가 찾은 예술작품의 새로운 형태는 좋았던 기억도, 아팠던 기억도 정성스럽게 해체하고 꿰매어 새로운 하나의 창조물로 탄생시킨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후에 레테의 강을 통해 망각의 세계로 들어간 이들이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는 그리스 신화처럼 그녀도 자신의 기억에 망각을 입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가 아니라 살기위해 그리는 그림

부르주아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돼 있는 것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이다. 마치 도로 위의 신호등처럼 빨강과 노랑, 초록색의 원색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둥근 점이 호박의 굴곡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반복되고 변화하면서 마치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감을 자아낸다.

그녀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둥근 점은 사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질환에서 비롯됐다. 불안장애, 강박장애, 환각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발작을 할 때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환영들을 보고 이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작품에 근간을 이루는 물방울무늬다.

1929년생으로 팔순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은 빨간색의 단발머리에 물방울무늬 옷을 입고 작업활동을 하는 그녀는 1977년부터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스스로 병원에 들어간 그녀는 병원 한 켠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정신질환을 꾸준히 치료하면서 작품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술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미술을 통해 오늘까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그녀에게 예술은 트라우마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을 치유하는 유일한 치료제가 아니었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전에 뮤지엄 산책에서 만났던 김환기와 유근택 작가를 비롯한 유영국, 바스키야, 주재환, 피터 할리 등의 작품을 통해 살아가면서 잊어버리거나 혹은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시선을 만날 수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는 추억이 아름답듯 망각 역시 아름답다.

나도 올 한해의 안 좋았던 기억은 모두 망각의 강인 레테에 흘려보내고 2018년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낼 준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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