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leeheekyoung@hotmail.com)

(갤러리 현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성큼 다가온 가을 앞에 우울한 일상

한여름의 더위가 물러난 자리에는 옷깃을 스치는 가을바람과 높고 청명한 하늘이 모두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하지만 그간 더위로 허약해진 심신엔 자연의 변화 앞에서 열병과 같은 우울증도 소리 없이 찾아온다.

어쩌면 청명한 가을날 딱히 우울할 이유가 없어도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우울하다는 울타리를 치는지도 모르겠다.

그 원인을 묻는 친구에게 “그냥 가을을 탈 뿐”이라고…. 딱히 대답할 만한 이유가 없어 이같이 얼버무렸다. 몇일 동안 스스로의 울타리에 가쳐 멍하게 창밖 넘어 펼쳐진 가을 하늘만 바라보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맛집과 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소는 소격동에 있는 만두국 집. 마침 바로 옆에 현대 미술관과 갤러리도 있어 산책 겸 집 밖을 나섰다. 만두국은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다. 이른 점심시간임에도 북적이는 실내를 보면 맛집은 분명한데 엄마가 해 주는 만둣국에 익숙해 진 탓에 웬만한 만두집은 성에 차지 않는다.

만두국 집을 나와 마치 동해바다를 담고 있는 듯 푸른 하늘과 상쾌한 바람을 벗 삼아 거리를 걷다 보니, 내 안에 있던 발전기가 이제 서야 가동하기 시작해 긍정의 마인드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갤러리에서는 내가 보고 싶었던 유근택 작가의 작품을 전시 중이었다.

유근택 작가 ‘Promnade-어떤 산책과 만나다

같은 기간, 성곡미술관에서도 제 1회 광주화루 작가상 수상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는 유근택 작가의 ‘갤러리 현대’ 전시 주제는 공교롭게도 ‘Promnade-어떤 산책’이었다.

작가가 평소 성북동 성곽 길을 따라 산책하며 마주한 풍경을 그린 <산책>시리즈를 비롯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소소한 일상들을 담은 <도서관>시리즈, <방>시리즈 등이 작가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구성돼 있었다.

얼핏 보면 그의 그림은 유화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색의 유화물감을 겹겹이 바르고 나이프로 긁어낸 듯 거칠고 두터운 질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한지에 수묵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명색이 한국화가다.

그렇다면 이런 두터운 질감의 마티에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해답은 그의 독특한 작업 스타일에 있다. 그는 먼저 여섯 겹으로 이루어진 한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이를 물에 적신다. 그리고 물에 젖어 불어난 한지를 철솔로 하나하나 긁어내며 종이의 섬유질을 일으켜 세운 뒤, 이 공간을 호분(조개가루)과 아교를 섞은 물감을 이용해 채워 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화면은 다양한 색상이 서로 겹치고 뭉개지며 깊은 색감을 만들어 내는 유화와 닮아 있으나, 겹겹이 쌓여진 한지에 스르르 스며든 수묵 물감의 특징 덕에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창안에서 창밖의 4계절을 그려낸 시리즈

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만의 독특한 작업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캔버스와 다르게 한지는 2미리도 안 되는 얇은 종이이나, 스며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스며든다는 건, 공간이 있다는 뜻이죠. 이 공간은 생각보다 넓은 세계입니다.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얇아 하나의 선 같이 보이는 종이 사이에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 작가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신선하다.

기존의 한국화가들이 산수화를 통해 보편적인 관념의 세계를 그려낸 것에 비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 현재에 집중한다. 나의 관념이란 내가 늘 마주하는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방>시리즈에서 그는 창밖으로 계절이 바뀌며 변해가는 모습을 다섯 개의 화폭에 담아냈다. 겨울에 시작해 한 계절을 돌아가는 창밖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자연은 늘 변한다.

지금 내 옆으로 찾아 온 가을은 작년 우리를 스쳐 지나간 그 가을이 아니다. 창밖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는 나 역시 하루하루 덧입혀 지는 세월의 옷을 입으며 변화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새로운 게 없을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변화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산책길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갤러리 안에서의 산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계속 걸었다. 조금 걸어가자 붉은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보였다. 얼핏 봐서도 연식이 좀 돼 보이는 이 건물은 1971년부터 2008년까지 ‘기무사’라고 부르던 국군기무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건물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그 보다 훨씬 앞선 1913년으로, 일제시대에 일본군 육군병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이후에 경성의학전문학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사용됐었다.

기존의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뒷편으로 전시관을 증축하고 중정 같은 마당을 설치해 작은 공원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곳의 컨셉은 ‘일상속의 미술관’이다. 그래서인지 2016년 10월부터는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도 휴관하지 않고 관람객을 받고 있다.

로비에서 이런 저런 전시회 소식을 접하고 있는데 통유리를 통해 바라 본 미술관 마당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바람에 날리며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2017년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우승작인 양수인 디자이너의 “원심림”이라는 작품이다. ‘원심력’과 ‘원시림’을 합성해 만든 ‘원심림’은 초록색 망사로 만들어진 나무형태의 구조체인데 여러 개의 구조체가 서로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숲처럼 보인다. 임의의 속도로 돌아가며 원심력을 이용해 부풀어 올랐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는 나무의 경쾌한 움직임을 보니 나의 마음도 덩달아 파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듯하다.

현대미술관을 거쳐, 정독 도서관, 서울교육박물관, 감고당 길로 이어졌던 나의 산책은 인사동 앞에서 끝이 났다. 마치 12시면 호박으로 변하는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아이들의 하교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네 시간 남짓, 길지 않았던 산책시간은 몇 일간 지속돼 왔던 우울함이라는 긴 터널의 출구를 찾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일상의 지루함에 지쳤던 내가, 매일 매일 달라지는 소소한 일상의 변주곡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산책’의 사전적 정의는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다. 나만의 페이스와 보폭으로 산책한 오늘, 나는 다시 건강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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