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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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플로리다대학교 의과대학의 종양학 교수 로도비코 발두치(Lodovico Balducci)는 ‘치료’(cure)와 ‘치유’(healing)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나,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다. 때로는 치료가 되었으나 치유에는 도달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치료에는 실패하였지만 치유에 도달한 경우도 있다.

이를 위해, 암으로 투병했던 메리(Mary)와 프란세스(Frances)의 두 가지 사례가 제시된다. 메리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절제 수술 후 항암과 재건 등 모든 치료를 마쳤으나, 그 과정 속에서 부부 간의 상호이해 부족 및 성격 차이가 심한 갈등으로 드러나 가족관계가 모두 파탄 나고,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반면에, 프란세스는 암 치료에는 실패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하면서 가족 및 주변 사람들과의 모든 화해를 이루고, 결국 평화로운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헬스케어 영성 2: 영적 돌봄의 개념, 219-226쪽 참조).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암은 그동안 수면 아래 잠재해 있던 정서적인 문제들을 일깨웠고 이는 다시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질병은 한 인격체 안에서 일어나 그 인격체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질병 치료에 있어, 진정 치유를 희망한다면 신체적 측면 외의 다른 차원들까지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발두치 박사는 말한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한 질병이 가져오는 경제적, 정서적, 사회적 결과들을 모두 다룰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어도 이러한 결과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환자에게 조언하고, 치료 계획에 있어 이런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며, 이러한 사안을 다루기에 합당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메리의 경우 왜 치유에 실패하였고, 프란세스의 경우는 왜 치유가 가능했던 것인가? 무엇이 이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인가? 발두치 박사는 그 핵심 요소가 바로 인간의 ‘영적’(spiritual) 차원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신체적, 정서적, 지성적, 사회적 영역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고유하고 특징적인 차원이다.

치료를 넘어서 치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인생 경험과 체험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초월적 감각과 통합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온전함’(wholeness)에 이르는 길은 단순히 발병 이전의 건강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치료 과정을 통해서 영구적인 신체적 손상을 입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온전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불사불멸의 육체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의 진정한 온전함이란, 자신이 지닌 과거의 상처, 현 상태의 고통, 그리고 미래의 죽음의 공포까지도 그 모든 것을 인격적 차원에서 수용하고 ‘화해’하여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다. 이러한 통합적 수용과 인격적 화해는 초월적 의미 체험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사랑과 연민의 체험이 이러한 초월적 의미 체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프란세스의 경우, 암 선고 이후 수면 위로 드러난 과거 인생의 상처뿐 아니라 현재의 고통 및 다가올 죽음의 공포와도 화해를 이루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 대한 인격적 통합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은 자기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봉사의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란세스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사랑과 연민을 통해서 온전함, 즉 치유에 이르게 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불교에서는 ‘이타자리’(利他自利)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을 향한 돌봄과 나눔의 선행은 곧 자신을 위한 이로움이 된다는 뜻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이 성불(成佛)을 위한 핵심 개념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발두치 박사는 말한다. “메리와 프란세스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모든 심각한 질병은 환자가 기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끔 해 항구적인 정서적, 사회적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성찰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죽게 될 것이며, 죽음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장애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자신의 온전함을 잃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필연적 운명이다. 그러므로 만일 죽음과 장애가 궁극의 적으로만 여겨진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프란세스의 사례는 장애와 죽음 속에서도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온전함이란 그 어떤 인간 상황에서도 의미를 발견함에 달려 있다는 것, 또한 장애와 죽음조차도 자신의 가치 있고 소중한 여러 인생 체험 중 하나로 수용함을 통해 비로소 온전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치유란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을 좋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229-230쪽)

결론적으로, 치유는 곧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이며, 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의 모순된 상황을 얼마나 통합적으로 잘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영적 성숙함’(spiritual maturity)의 문제이다.

따라서 온전함은 곧 ‘화해’(reconcili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연민(compassion)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발두치 박사가 강조하듯이, 극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영적인 의미 체험은 삶의 새로운 차원에 눈을 떠 보다 높은 곳을 향한 질적인 도약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치유와 통합, 즉 온전함을 향한 영적 성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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