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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는 봤는가, ‘펌킨 스파이스 라떼(PSL)’를
들어는 봤는가, ‘펌킨 스파이스 라떼(PSL)’를
  • 이서하 기자
  • 승인 2020.06.03 2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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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기자의 맛집 탐방기 Episode. 5
PSL, 미국에선 ‘가을을 알리는 음료’로 유명
눈과 입이 즐거운 카페, 운정 ‘Botanist’

에디터 | 김응민 (emkim8837@healingnlife.com)

 

내 커피 취향은 ‘얼죽아’다. 얼죽아란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뜻으로, 더울 때는 물론이고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어도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사실 처음부터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진 않았다. 필자가 처음 아메리카노를 맛본 때는 대학생 새내기 무렵이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추운 겨울날 잠시 몸을 녹이러 들어간 커피숍에서 호기롭게 “마시고 싶은 것 있으면 아무거나 시켜”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당시 내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무거나’ 시키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차마 다른 말은 못했고, 대신에 내가 값싼 음료를 마시면 괜찮을거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카운터에 서서 메뉴판을 훑어보니 가장 싼 메뉴는 ‘에스프레소’ 였다. 다행히 일전에 TV 프로그램을 통해, 에스프레소는 양도 적고 한약만큼 쓰다는 사실을 배웠던지라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그다음으로 저렴한 메뉴가 바로 ‘아메리카노’였다. 가격 차이도 에스프레소와 얼마 나지 않았다. 다른 메뉴들은 무려 이, 삼천 원씩 차이가 났던 반면에 아메리카노는 그 차이가 고작 천 원 남짓이었다.

‘아메리카노? 미국인들이 마시는 음료인가’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며 당당히 주문을 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커피를 한 입 먹자마자 입에서 느껴지는 쓴맛에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푼 아끼려다 알게 된 인생의 ‘쓴맛’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쓴’ 커피와는 담을 쌓고 살다가 군 전역 후 모험을 해봤다. 신기하게도 새롭게 먹은 아메리카노는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여전히 쓰긴 했지만 견딜만 했고, 이번에는 맛보다 ‘향’이 느껴졌다.

그 이후론 아메리카노‘만’ 찾게 됐다. 특히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아메리카노가 없이는 업무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카페에서도 늘 아메리카노만 주문했다. 저렴하고 무난하고 대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들른 동네 카페에서 낯선 메뉴를 접했다.

메뉴의 정체는 ‘펌킨 스파이스 라떼’였다. 이름도 생소한 이 음 료를, 대학생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며 용기 내 주문했다. 막연히 ‘호박맛이 내 입에 잘 맞을까’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이윽고 음료가 나왔다. 컵 아래에 커피가 깔려 있었고 음료의 대부분을 우유가 차지하고 있었다. 유당불내증이 있어 우유와는 상극인 내게 최악의 메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가 밀려오며, 문득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셨을 때의 아찔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런데 한 모금 마시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맛이 느껴졌다. 우유는 거북하지 않았고 음료도 지나치게 달지 않았다. 거기에 은은한 ‘펌킨’의 향이 입안을 감쌌다. 순식간에 한 잔을 다 비우고 사장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이 ‘커피’의 정체를 물어봤다.

사장님은 “사실 ‘펌킨 스파이스 라떼’는 미국에서 굉장히 흔한 음료에요”라며 “우리나라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아’라고 줄여 부르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이 커피를 Pumpkin Spice Latte 의 약어, 즉 ‘PSL’로 부른답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3년간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유학·직장 생활을 한경험이 있는데, 마침 우리나라에서 카페를 개업했을 때가 가을 무렵이었어요”라며 “그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즐겨 마시는 이 ‘PSL’을 한국에선 찾을 수 없어서 ‘그럼 내가 한번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사실 PSL은 미국에서 굉장히 대중적이고, ‘가을을 알리는 음료’로도 유명해요”라고 설명했다.

거기에 카페 이름인 ‘Botanist(식물의, 식물학자)’처럼 PSL에 우유 대신 단맛이 없는 두유를 넣었다.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내가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또한, 가게 이름처럼 카페 여기저기에는 녹색 식물을 품고 있는 화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페 이름이 보타니스트인 이유를 묻자, 사장님은 “제가 지냈던 벤쿠버와 시애틀에는 가게마다 채식 메뉴가 꼭 있었어요”라며 “한국에도 야채만 먹는다고 거부감을 느끼기보단 재미있고 새롭게 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됐네요”라고 답했다.

이어 “보나니스트엔 대중적인 메뉴들도 당연히 있지만 반 이상은 다른 카페에선 쉽게 찾지 못할 메뉴가 많아요”라며 “앞서의 PSL 외에도 간단한 식사 메뉴로 후무스(Hummus) 샌드위치나 아보카도 샐러드 파스타가 있는데, 미국에서 저와 제 비건 (Vegan, 실천 가능한 채식주의) 친구들이 만든 레시피를 사용해 요. 자극적이진 않지만 감칠맛이 있어서 먹을 당시보다 그날 밤에 괜스레 생각나는 맛이에요”라고 말했다.

사장님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내 입가에서도 ‘펌킨 스파이스 라떼’의 여운이 맴돌았다. ‘한동안은 꼼짝없이 보타니스트에 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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