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등재약 사후평가’가 제약업계에 태풍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합리적인 보험 재정지출을 위한 약제 사후관리가 필요하다는 게 보건복지부의 입장이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기등재약 재평가 대상과 그 실시 방안의 ‘밑그림’을 공개한 이후 제약업계의 불안감이 극심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정부가 2007년경 시행한 ‘기등재약목록정비사업’의 트라우마 탓이다. 당시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합리성’이었지만 당시 제약업계는 일괄약가 인하를 감내해야 했다. 업계에서 최근 ‘기등재약’ 사후평가가 결국 일괄 약가 인하로 귀결될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팜뉴스는 창간특집 기획으로 ‘기등재약 사후평가’의 문제점과 대안을 짚어봤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심평원은 지난해 12월 공청회를 통해 업계의 초미의 관심이었던 ‘기등재약 사후평가’의 대략적인 방향을 공개했다. 심평원에 따르면 사후평가의 주요 대상으로 고비용의약품에 해당하는 항암제와, 희귀의약품치료제 등을 비롯해 임상적 유용성이 불확실한 약제들이 선정될 예정이다.

심평원이 이날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민 총 진료비는 약 78조원, 약품비는 약 18조원을 기록했다. 약품비는 2013년(13조 4491억), 2014년(14조 986억), 2015년(15조 4287억) 2016년(16조 2098억), 2017년(17조8669억)으로 지난 5년간 꾸준히 늘어났다.

국민 의료비 중 약품비 비중은 OECD 국가의 1.24배 수준이란 게 심평원의 평가다. 국민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의약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등재 의약품에 대한 ‘사후평가’가 절실하다는 것. 이는 지난해 5월 복지부가 발표한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 시행계획(안)’에서도 예고된 ‘명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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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심평원 발표 이후 제약업계가 극도의 불암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 제약사의 약가 협상 담당자는 “심평원 발표 이후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며 “마치 코로나19처럼 어느 제약사의 어떤 의약품이 걸릴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반기에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지면 대응방법이라도 찾겠지만 지금은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후평가의 명분은 그럴 듯하다”며 “하지만 결국은 또 하나의 약가 인하의 툴로 작용할 것이다. ‘기등재약목록정비사업’ 때 겪었던 아픔이 떠오른다. 당시에도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합리적인 약가’를 위해 의약품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일괄적인 약가 인하’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2007년경 ‘기등재의약품목록정비사업’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의약품의 약효를 재평가해 가격 대비 효과가 뛰어나지 않은 약품에 대해 약가를 내리거나 아예 보험급여 목록에서 제외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선별등재제도’ 실시(2006년12월29일) 이전 등재된 의약품을 순차적으로 정비한다는 취지였다.

당시 복지부는 2007년 편두통, 고지혈증 치료제에 대한 시범평가를 시작으로 목록정비 사업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불과 3년 만에 기등재의약품를 동일 성분 최고가의 80% 수준으로 일괄인하하는 방안을 확정했다. 기등재의약품 급여목록을 차근차근 정비하기로 예정된 기존의 방침을 사실상 철회하고 ‘일괄약가인하’를 시행한 것.

앞서의 약가 담당자는 “고지혈증 치료제 시범사업부터 논란이 불거졌다”며 “스타틴 계열 약물에 대한 모든 임상, 문헌자료를 뽑아서 약효를 비교하고 경제성 평가를 통해 메타분석한 자료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분석을 했다. 하지만 고지혈증 치료제의 1차적 목표를 심혈관계질환의 예방이 가능한 지를 놓고 평가한 결과, 약제별로 뚜렷한 효과상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심바스타틴 계열 제네릭 의약품에 대한 일괄 약가 인하가 이뤄졌다”며 “하지만 이 과정에만 2년이 걸렸다. 당시 약효상 ‘차이가 있다’고 얘기하는 쪽은 물론 반대 측도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고혈압 치료제도 같은 방식으로 했는데 결국 약효간 차이 연구에 대한 지연과 불신, 기준의 모호성 등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다가 결국 복지부가 일괄약가 조치를 단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기등재약목록정비사업이 제약업계에 ‘트라우마’ 형태로 깊숙이 자리잡은 배경이다.

≫ 한국형 ‘우주 잣대’, “중복 규제 아니고 뭐란 말인가”

‘기등재약 목록정비사업’에서 겪었던 극심한 고통을 정신의학적 용어인 ‘트라우마’로 비유할 정도로 업계는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기등재약 사후평가를 보면 13년 전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른다. 그때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부가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약가 인하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기등재약 사후평가’를 위한 구체적인 기준은 뭘까.

보건당국은 ‘기등재약 사후평가’를 ‘재정기반 사후평가’와 ‘성과기반 사후평가’로 구분해 시행할 계획이다. 재정기반 사후평가에서는 재외국 가격비교 재평가와 등재년차 경과 약제 재평가를, 성과기반 사후평가 부분은 문헌기반 약제 재평가와 RWE 기반 약제 재평가가 이뤄질 예정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문헌재평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앞서의 약가 협상 담당자는 “중복 규제 성격이 강하다”며 “일부 약들에 대해서는 기등재약의약품목록정비사업을 통해 이미 평가가 완료됐다. 식약처 허가를 받는 것도 까다로운 과정이지만 그때도 문헌 자료를 냈다. 같은 문헌 재평가로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면 사후평가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약바이오협회 장우순 상무는 “문헌을 통한 잣대가 질환 특수성을 반영하기 어려움에도 질환별 임상시험의 차별성을 무시하고 일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한 시도”라며 “예컨대 임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있을 수 있고 임상요건이 제한적일 수도 있다. 문헌에 나온 것만으로 약에 대한 임상적 유용성을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덧붙였다.

업계의 우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항암제 사후평가를 위해 생존기간(OS) 등 소명자료를 제출할 경우가 문제다”며 “해외에서는 일부 항암제가 이미 급여권에 들어온 상태이고 실제 사용해서 효과를 보고 있어 더 이상 OS에 대한 임상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경우 재평가를 위해 업데이트된 OS를 추가적으로 요구하면 제약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며 “재평가만을 위한 OS 데이터 준비를 새롭게 해야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 무조건식 ‘비싼약’ 색안경, ‘억울한 죄인’ 속출할 수 있어

심평원 자료에 따르면, 문헌기반 약제 재평가의 또 다른 축은 ‘의약품 가치평가(Value-Based Framework)’ 제도다. 심평원은 지난해 4월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미국임상종양학회(ASCO-NHB) 등의 가치 평가도구를 비교 분석하고, 국내 제도를 반영해 개발한 한국형 모형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용역을 맡겼다.

실제로 미국임상종양학회는 2015년 효능(임상적 이익), 안전성(독성), 그리고 효율(비용)의 측면에서 항암제의 가치를 정의하고, 3가지 요소를 결합한 기준을 통해 항암제의 임상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도구를 개발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항암제 가치평가도구를 이용한 의약품 사후평가에 대한 신중론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교수는 “미국과 유럽의 가치평가도구는 수년에 걸쳐 개발됐다. 실제 임상 현장에 도입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ASCO의 평가 툴들은 세밀하게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평가 결과의 약가 반영은 더욱 쉽지 않은 이유”라고 전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보건당국은 RWD 산출된 ‘실제임상근거(RWE)’ 데이터를 사후평가에 활용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에서는 경계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의는 “실제 진료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오류가 많다”며 “특히 임상 허가를 위해서는 무작위 배정과 이중맹검이 필요하다. 하지만 RWD에는 무작위배정이나 맹검과 같은 절차가 없다. 기본적으로 오류가 많고 신뢰하기 어려운 데이터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급여 퇴출이나 약가 인하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통계학자와 데이터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없이 사후평가가 이뤄질 경우 제약사들의 반발에 부딪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보건당국이 향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명약관화’한 기준 없이 기등재약 사후평가를 진행할 경우 억울한 제약사들이 속출할 것이란 전망이 들리고 있다.

대형 제약사의 약가 담당자는 “장기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제약사 입장에서도 중요하다”며 “그래야 제대로 된 약가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기준 없이 무조건 ‘고평가’ 돼 있다는 잣대로 사후평가를 진행한다면 억울한 제약사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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