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약시장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약가 ‘코리아 패싱’ 현상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이 한국을 보험약가 참조국가로 한국을 추가한 이후 업계에서는 다국적제약사 본사의 의약품 발매 전략이 ‘선-중국, 후-한국’으로 급선회하고 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약가 협상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향후 약가 ‘코리아 패싱’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란 전망마저 들리고 있다. 13억 인구의 거대 시장 가치를 포기하면서 우리 정부와 협상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 국내에서 낮은 약가를 받으면 중국 정부와의 약가 협상에서 감수해야할 ‘리스크’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이유에서다. 업계에서는 현행 약가 협상 시스템이 유지될 경우 ‘중국발 약가 코리아 패싱’ 현상으로 인해 국내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들리고 있다. 약사신문은 창간 특집 기획으로 다국적제약사의 약가 담당자와 업계 관계자들과의 증언을 토대로 ‘중국발 코리아패싱 현상‘의 문제점과 대안을 짚어봤다.

국내 환자들이 ‘약가’를 바라보는 관점은 ‘급여’다. 보험 등재 의약품이 아니라면 환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약을 복용하기 위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약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급여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다. 환자들은 ‘약가’를 결정하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소외당한다. ‘급여’는 기본적으로 ‘배제’를 전제한다.

국민이 약가 협상에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다국적제약사와의 약가 협상에서 ‘합리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다국적제약사와 약가 협상에 실패하면 환자들의 신약 또는 희귀질환의약품에 대한 선택권과 접근성은 제한된다. 정부가 ‘국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협상에 임해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의 약가 협상 시스템이 과연 합리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키워드들이업계에 회자하기 시작했다. 중국발 ‘약가 코리아 패싱’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한국을 약가 참조국으로 정하면서 다국적제약사가 높은 약가를 책정받기 위해 국내에서 의약품의 급여 등재를 포기하거나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

≫ ‘중국발 코리아 패싱’ 현상 현실화…전방위적 확대 ‘예고’

그렇다면 ‘중국발 약가 코리아 패싱’ 현상은 사실일까.

약가 협상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라며 “일단 제약사가 약가 협상을 시작하면 중국 정부는 전문가 위원회 등의 자문을 통해 결정된 약가안을 가지고 온다. 하지만 공개하지 않는다. 이것이 맹점이다. 제약사와 중국 정부, 즉 양측이 제시한 약가 차이가 15%이상이면 중국 정부는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 제약사가 제시하는 가격이 중요한 이유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여기서 중국이 우리나라를 약가 참조국으로 넣은 점이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며 “제약사 입장에서는 중국 정부와 협상할 때 우리 정부와 협상한 약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우리 약가를 참조하기 때문이다. 더욱 낮은 약가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본사 입장에서는 차라리 한국의 급여 등재를 포기하거나 늦추는 편이 이익이다. 실제로 이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발 코리아 패싱’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와 협상할 때 우리 약가가 중국 약가에 정확하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산출할 수 있다면 시뮬레이션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본사 입장에선 차라리 약가 참조국가에서 우리나라가 목록에 없을 때 편안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코리아 패싱의 현실이다. 더구나 중국은 압도적인 의약품 시장 규모를 자랑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국은 전세계 의약품 시장의 30~40%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다. 더구나 중국의 의료보험은 2006년에 5억명 밖에 커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중국 전체 인구인 14억명의 약 95%가 의료보험 대상자다(2017년 기준). 전체 의료행위의 80% 이상이 급여를 보장받고 있다. 우리나라 4천 5백만 인구의 등재 의약품 수요에 비하면 차원이 다른 시장 규모인 것.

≫ ‘역설적인’ 국내 약가시스템, 중국발 코리아패싱 ‘양산’

그렇다면 중국발 코리아 패싱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업계에서는 ‘매력이 넘치는(?)’ 우리 정부의 약가 시스템 때문이란 지적이 들리고 있다.

앞서의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약가는 투명하고 신뢰하기 좋다. 다른 나라가 참조국으로 추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며 “위험분담제가 적용된 의약품 수가 상당히 적고, 대부분은 일반약제들이다. 표시약가에서 부가세만 빼면 실제약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 상당히 참고하기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2013년 본격적으로 시행된 위험분담제도는 보험자와 생산자 사이의 급여 등재 시 불확실성의 부담을 나누는 형태의 계약이다. 약제의 효능·효과나 건강보험 재정에 미칠 영향 등이 불확실한 신약에 대해 제약회사와 정부가 분담하는 조건으로 급여를 적용하는 제도다. RSA에선 표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다른, 이중가격제 적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부는 위험분담제의 조건은 ‘대체제가 없는 고가의 항암제나 희귀질환치료제’로 한정했다. 위험분담제가 적용된 의약품이 적기 때문에 중국이 국내 약가를 참고하기에 제격이라는 얘기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더구나 중국은 우리나라의 인접국이다”며 “이웃나라 정부가 약가에 대한 비용효과성을 따져 약가를 결정하는데 당연히 참고할 수밖에 없다. 국민 모두가 보험급여를 적용받는 단일보험자 체계인 점도 중국과 비슷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고 덧붙였다.

이점이 현행 약가시스템의 ‘역설’이다. 투명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약가 시스템이 ‘비합리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 중국발 코리아패싱을 양산하는 ‘역설적인’ 약가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보험 등재 의약품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중국 정부는 의료보험 의약품 목록에 신규 항암제,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 치료제 등 476종의 신규 의약품을 등재했다. 기존 2510종에서 2986종(양약 1567종·중약 1419종)으로 급증한 것. 업계에서 ‘중국발 코리아 패싱 현상’을 향후 전방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예측이 들리고 있는 까닭이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의 보험 등재 의약품이 앞으로 더 늘어나면 코리아 패싱도 더욱 본격화될 것”이라며 “더욱 무서운 것은 ‘재평가’다. 중국은 보험 등재 의약품을 영원히 지속시켜주지 않고 2년마다 재평가한다. 약가를 다시 산정하기 위해서다”고 설명했다.

이어 “글로벌 제약사의 본사가 우리나라에 신약을 뒤늦게 등재한다고 해도, 우리 정부에서 결정된 약가는 재평가 과정에서 다시 참조될 수밖에 없다”며 “약가 참조국으로서 최초 보험 등재시 뿐 아니라 재평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약가 코리아 패싱이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정부, 위기 신호 감지해야”…위험분담제만이 ‘살 길’

그렇다면 ‘중국발 코리아 패싱’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은 뭘까.

업계는 줄곧 위험분담계약제(RSA, Risk Sharing Agreement)의 확대를 주장해왔다. RSA를 학대하고 표시가를 통해 참조약가를 높이면, 중국 정부가 참고하는 국내 약가 수준이 지금보다 올라가면서 코리아 패싱이 점진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계산이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RSA로 급여를 등재하면 표시가를 높이고 실제 약가는 낮춰, 중국 정부가 우리나라 약가를 참고할 때 표시가를 참고하도록 할 수 있다”며 “중국이 12개 나라를 약가참조국 목록에 올린다면 우리나라가 ‘최저 약가’만 아니면 되기 때문에, 이 해법은 한국이 최저약가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실제가를 낮추면서 건보재정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위기의식을 느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위험분담제는 표시가를 높일 수 있으니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실제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위험분담제를 자유롭게 시행 중이다. 위험분담제를 확대하지 않으면 중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약이나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한 선택권과 접근성을 박탈당할 것이다. 코리아 패싱의 미래이자 현실이다. 정부가 위기 신호를 재빨리 감지해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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