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자기 자신의 심각한 질병이나 갑작스러운 사고의 체험은 우리가 걸어가던 인생 여정을 멈추게 하고 정상적인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게 하며, 결국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상실의 위기가 된다. 또한 가족 등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로 인한 상실의 체험 역시 심각한 슬픔과 도전으로 우리 삶에 다가온다.사별로 인한 상실의 기억과 충격은 점차 망각되어가는 것 같다가도 언제 어디서든지 문득 되살아날 수 있다. 일상을 잘 살다가도 떠나간 사람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엄습하여 그 사람의 부재를 실감하며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필자는 몇 년 전에 '라쉬의 작은 꽃들: 라쉬 공동체의 진실한 이야기'(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란 책자를 번역해 발간한 적이 있다. 프랑스어로 ‘방주’라는 뜻을 지닌 라쉬(L’Arche) 공동체는 캐나다인 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 1928-2019)가 설립한 장애우 국제 공동체이다.이 책은 전 세계 곳곳의 라쉬 공동체에서 있었던, 짧지만 아름다운 일화들을 모아서 소개한 단행본이다.이 책의 서문에서 장 바니에는 말한다.“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며 믿을 수 없는 결과물들을 산출해낸다. 이제 과학기술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까지도 지배할 것인가?전통적으로 인간 내면의 믿음에 관한 것은 종교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과 종교는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대화가 가능한가?첨단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 이는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필자는 세계 가톨
인간이면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시련과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깊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덫에 걸린 듯 느끼며 무력감에 빠지고, 위기 상황으로부터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해 좌절한다.많은 경우에 고통은 상실 체험과 관련된다. 인간관계 차원의 정신적, 사회적 상실이나 경제적 차원의 상실, 혹은 자기 신체와 관련한 물리적, 생물학적 상실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실 체험을 하는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예를 들어 암을 진단받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비탄과 탄식을 쏟아
누구에게나 어렸을 때 몸이 아파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아주 오래 전 필자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친한 동네 친구들과 내기를 걸고 달리기 시합을 하게 되었다.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그 내기에서 꼭 이기고 싶었기에 한참 속력을 내며 길거리를 뛰어가고 있었다.그런데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어떤 아이가 갑자기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아이를 피하지 못하였고, 나보다도 작았던 그 아이 이마에 그만 내 코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이 충돌로 인해 코뼈에 문
요즘 교육에서는 창의성에 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마치 신의 능력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그런 의미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신적인 창조 능력에 비하면 인간의 창조 능력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인간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주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해서이다. 현재의 대처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위기의 긴장감 속에서 혁신을 위한 잠재적 능력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기는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창의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위기
강원도 평창군 봉편면 무이리에는 ‘무이예술관’이 있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조각, 도예, 회화, 서예가 함께하는 작업실이자 예술관으로 꾸며서 2001년 개관한 곳이다.가끔 이곳을 방문하면 도시의 바쁜 삶에 지쳐버린 우리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의 향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넉넉함을 느끼게 된다.더욱이 이곳은 소설 으로 유명한 작가 이효석(1907-1942)이 태어나고 자란 곳 부근이기에,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이 만개하여 이 부근을 온통 하얀 색으로 뒤덮는다.그래서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여덟 번째 그림은 구약성경 창세기 6-8장에 나오는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룬다.인간의 교만과 탐욕, 그리고 그로 인한 분열의 상처와 폭력이 용서와 치유의 과정을 통해 정의 안에서 회복되지 않을 때 인간 세상에는 악의 실재가 만연하게 되고 마침내 혼란과 파멸의 위협이 찾아오게 된다.창세기에서 인간의 죄악에 대한 벌로 찾아온 것은 대홍수로 인한 혼란이었고, 여기서 의롭고 흠 없는 사람 노아만이 방주를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살아남는다.고대 근동의 문화와 세계관에서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그림은 구약성경 창세기 7-8장에 나오는 대홍수 및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메시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에는 나오지 않는 창세기 4-6장의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한다.지난번에 보았던,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다루는 미켈란젤로의 여섯 번째 그림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이야기를 다룬다, 그 이후 남자와 여자는 두 아들을 낳는다. 형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둘 다 제
에덴동산에서 충만함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인간에게 불현듯 죄의 유혹이 다가온다. 불행히도 인간은 그 유혹에 빠져 평화는 깨어지고, 이 세상에는 죄와 악의 실재가 생겨나게 된다.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중앙 천장화 중 여섯 번째 그림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죄와 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그림은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설명한다. 그림의 왼쪽 절반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는 장면을, 그리고 오른쪽 절반에서는 그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